정후겸(鄭厚謙, 1749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외척,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字)는 백익(伯益)이다. 원래는 평민 아들이었으나 먼 일가 방척 숙부인 일성위 보환 정치달(영조 서녀였던 화완옹주의 부군)의 양자가 되면서 화완옹주의 양자[1]로 관직에 올랐다. 탕평당계 소론이었으나 뒤에 노론 외척파벌로 넘어갔으며. 홍인한 등과 함께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다 정조 즉위후 유배되고, 삼사의 계속된 탄핵을 받다가 배소에서 처형되었다.

1907년(융희 1년) 이후 이완용의 여러번의 복권 상소로 1908년 4월 복권되었다.[2]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그는 조선 인천 제물포(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에서 생선장수를 하던 정석달(鄭錫達)과 전주이씨의 6남 2녀 중 둘째아들로 출생하였고, 뒤에 계모 은진송씨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양반의 후손이었으나, 생부 정석달은 생선장수였다 한다.[3] 생부 정석달의 대에 가서는 생계를 얻기 힘들어 장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양인 출신이었던 그는 1764년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와 그녀의 상배 부군이었던 정치달(鄭致達 1757년 하세)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아버지 정석달과 같은 항렬이었기에 가계상 아저씨뻘 되는 먼 친척이 되었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랐으며, 일찍부터 영특하고 언변에 능하여 양 외할아버지인 영조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상주로 특명을 받고 장원봉사(掌苑奉事)로 승진했으며 이에 아울러 친형 정일겸(鄭日謙)도 1772년 정시문과에 병과 급제한 후 승정원 승지에까지 오른 적이 있다.

1766년(영조 42) 홍문관부교리,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 부교리와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이후 화완옹주의 양자라는 배경으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으며, 이후 승승장구해 20대의 나이에 병조 참판에 올라 당대의 실권자로 성장했다. 한때 화완옹주가 세손 이산을 제거하고 그를 임금으로 추대한다는 날조된 루머가 시장에 유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인평대군, 숭선군에게 남자 후손들이 있었으므로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769년 개성부유수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호조참의, 호조참판, 공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세손과의 갈등과 최후 편집

원래 그의 양부쪽 가계는 탕평당계 소론이었지만 다른 친척들과 함께 노론 외척당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노론 외척 세력의 중진이 되어 세손(훗날의 정조)와 갈등하였다. 그는 홍인한, 김귀주 등과 결탁,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하고자 온갖 음해와 모략을 저질렀으며, 이 과정에서 친세손계 인사 홍국영(洪國榮), 정민시, 그밖에 노론 청명당의 김종수 등과 대립하였다. 한편으로 동궁에 사람을 심어두고 비밀리에 세손의 언동을 살피게 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홍인한 등의 사주를 받아 세손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부사직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궁의 궁료인 홍국영을 탄핵하고, 김종수의 제거를 획책하였으나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의 계획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774년 공조참판, 1776년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의 추천으로 비국당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에는 그의 평소 품행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며, 막대한 재산을 착복하여 전횡을 일삼았다고 적혀 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숙청 작업에 들어갔는데, 양사에서는 정후겸, 홍인한 등을 수시로 계속 탄핵하였다. 정후겸은 홍인한, 홍상간 등과 함께 폐서인된 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으며, 1776년 5월 3일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계희의 친척들이 무사를 고용, 정조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자, 여러번 양사로부터 공격을 당한 끝에 7월 5일 홍인한, 문성국 등과 함께 참형 또는 사사당했다.

기타 편집

화완옹주는 작위를 박탈당하고 정치달의 처라는 뜻의 정처 혹은 정치달의 처로 호칭되었고, 그의 생부 정석달 등도 유배되었다.

사후 편집

묘소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1806년(순조 6년) 순조 때에 이르러 김조순 집권 이후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후에 같은 항렬의 먼 친척 정해담(鄭海淡)의 아들 정기원(鄭璣源)을 사후 양자로 삼았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2] 1908년(융희 2년) 1월 이완용 등의 건의로 작위와 시호가 회복되었다.[4] 1908년 4월 죄적에서 삭제되고 명예회복되었다.[2]

가족 관계 편집

관련 도서 편집

  • 창경궁 동무(배유안 저) - 정조와 정후겸의 아름다울 수 있었던 우정이 어떻게 어긋났는지 잘 알아볼 수 있는 책. 마지막 장면에 정후겸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같이 보기 편집

정후겸을 연기했던 배우들 편집

TV 드라마
뮤지컬

각주 편집

  1. 정치보복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2.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3. 영조실록 103권, 영조 40년 4월 14일 을미 2번째기사 1764년 청 건륭(乾隆) 29년, "홍봉한이 정치달의 아들 정후겸에게 부직할 것을 청하다"
  4.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1월 30일(양력) 4번째기사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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