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전동 (용인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하위 행정구역

죽전동(竹田洞)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법정동이다. 죽전1동, 죽전2동, 죽전3동은 행정동이다. 옛 수지읍 죽전리수지읍사무소의 풍덕천동 동쪽에 위치하였다. 수지(水枝)는 예로부터 풍덕천리와 죽전리, 성복리의 성복천 물줄기가 합쳐진 풍덕천동과 죽전동, 성복동 수계(水系)들이 합수되어 한강으로 흐르는 탄천을 이룬다.

죽전1동
竹田1洞
로마자 표기Jukjeon 1(il)-dong
행정
국가대한민국
지역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행정 구역35개 , 264개
법정동죽전동
관청 소재지경기 용인시 수지구 대지로 15번길 50
지리
면적3.1km2
인문
인구29,094명(2022년 2월)
세대20,719세대
인구 밀도9,400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죽전1동 행정복지센터
죽전2동
竹田2洞
로마자 표기Jukjeon 2(i)-dong
행정
국가대한민국
지역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행정 구역22개 , 194개
법정동죽전동
관청 소재지경기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523
지리
면적2.7km2
인문
인구18,311명(2022년 2월)
세대7,442세대
인구 밀도6,800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죽전2동 행정복지센터
죽전3동
竹田3洞
로마자 표기Jukjeon 3(sam)-dong
행정
국가대한민국
지역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행정 구역33개 , 252개
법정동죽전동
관청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대지로 42
지리
인문
인구26,916명(2022년 2월)
지역 부호
웹사이트죽전3동 행정복지센터

이곳은 본래 용인군 수진면의 지역으로서 성복동에서 발원한 성복천죽전동 유역을 형성하고, 한강(漢江) 수계의 하구(河口)가 된다. 큰 못이 있어 대지 또는 죽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풍덕천(豊德川)에서 감바위(玄岩), 점촌, 대지(枝), 내대지(안대지말), 풍덕내(풍덕천동) 일부를 병합해 수지면 죽전리라 하였고 일제의 일본인들 거류민단(居留民團) 자치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읍삼(구성)면에 강제 편입되었지만 1973년 7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령 제1983호에 의하여 다시 수지면으로 복구되었다. 수지구청이 위치한 풍덕천동 수지택지지구가 개발된 이후 수지택지지구 지구단위계획구역에서 '용인죽전 지구단위계획'으로 '용인동천 지구단위계획' 동천동과 같이 개발되었으며 지상 경부고속도로풍덕천동과 죽전동을 구분하고 있다.

역사 편집

지명 유래 편집

죽전동은 본래 용인군(龍仁郡) 수진면(水眞面)의 죽전동(竹田洞)이다. 용인군 수진면(水眞面) 풍덕천(豊德川)에 큰 못이 있어 대지(枝) 또는 죽전(竹田)이라 하였다. 고려시대 용구현(龍駒縣) 수진면(水眞面), 조선시대 태종 13년 용인현(龍仁縣) 수진면(水眞面)이었고 수진면에 속한 행정구역은 성복동(星福洞), 죽전동(竹田洞), 서봉동(瑞峯洞), 신리(新里), 정평리(停坪里), 동막리(東幕里), 손기리(孫基里), 고분현(古分峴)이었다. 『1872년 지방지도(1872年 地方地圖)』 용인현(龍仁縣)에는 풍덕천장기(豊德川場基)라 하여 수진면(水眞面) 명칭으로 토월리, 죽전동, 성복동이 확인되며 탄천 유역을 형성하고 있다. 수진면(水眞面) 죽전동(竹田洞)은 풍덕천(풍덕천동) 지역으로 포은 정몽주의 면례(緬禮) 행렬이 이어진 풍덕천(豊德川) 지역에서 음운변화를 일으켜 죽절(竹節)로부터 죽전(竹田)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진면(水眞面) 풍덕천(豊德川)에서 토월리(吐月里), 신리(新里), 정평리(亭坪里) 일부를 풍덕천리, 감바위(玄岩), 점촌, 대지(枝), 내대지(안대지말), 풍덕내(豊德來)를 포함한 풍덕천동 일부가 수지면 죽전리로 병합되었다. 이후 일제 일본인들 거류민단(居留民團)의 자치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수지면 죽전리는 읍삼면으로 강제 포함되었고, 1937년 중앙계획소안(中央計劃素案) 수도이전 사전계획에 따라 구성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73년 대한민국 대통령령(大統領令) 제1983호에 의해 다시 수지면으로 이속해 복원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대지(大池)는 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득세하였을 때 마을 앞에 큰 연못을 파고 대지(枝)라 부르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풍수적인 소응(昭應)을 관련짓는 속설이다. 또 다른 설로 모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명칭인 돼지고개는 '큰 고개' 대치(大峙)의 변음으로 결국 대치(大峙)고개 아래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대지라 부른 것인데 대지(枝) 마을 앞에 있는 다리를 죽전교(竹田橋)라 부르는 것을 보면 오히려 대지는 죽전(竹田, 대나무 밭)의 한글 표기로 보인다. 『1898년 지방지도』에도 죽전(竹田)이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풍덕천(豐德川)'의 지명으로 ‘죽절(竹節)'에서부터 불리게 되어 음운변화(音韻變化)가 일어난 것이다. 기록에는 삼남대로(三南大路)인 죽절(竹節)에 홀연히 명정이 날아올랐는데 이곳에 포은 정몽주의 면례가 왔던 곳이라 하여 풍덕(豐德), 풍덕래(豐德來) 또는 이장하는 도중 명정이 날아오른 곳에서 풍덕천(豊德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풍덕천(豐德川)의 이 마을은 어떤 식으로든 대나무와 관련되어 있다. 대나무하면 충절 · 절개를 상징하는데, 모현면 능원리에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묘소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1411년 개풍군의 풍덕(豊德)에 있던 포은 정몽주의 묘소를 경상북도 영천(永川)으로 이장하려 할 때, 포은 정몽주의 면례 행렬이 옛 수지읍 풍덕천리(수진면 풍덕천)에 이르자 면례 행렬 앞에 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떨여졌고 사람들이 명정이 떨어진 곳을 쫓아가 주위 형세를 보니 명당자리라 하여 개풍군(開豊郡)에 있던 포은의 무덤을 용인에 쓴 후, 포은 정몽주의 면례(緬禮) 행렬이 이어진 풍덕천(풍덕천동)의 지명을 죽절(죽전동)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의미하는 대나무를 떠올려 이 마을의 이름을 죽절(竹節) · 죽전 등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단국대학교의 앞 마을이 '성현마을'로 불리고 있어 무관하지 않은 유래이다.

연혁 편집

인구 편집

 
죽전동 연령별 인구구조

죽전1동 편집

죽전1동의 인구는 56,682명(2020년 8월 기준, 내국인)으로 용인시 전체 인구의 6.2%를 차지한다. 남자는 27,381명, 여자는 29,301명이며 세대수는 20,719세대이며 외국인은 622명이다.[2] 죽전1동의 인구구조는 도시 지역의 특성이 나타나서 유소년 인구비율은 19.7%로 용인시 전체 18.3%보다 많으며, 노인인구비율은 9.3%로 용인시 전체 10.3%보다 적다.[3]

죽전2동 편집

죽전2동의 인구는 18,449명(2020년 8월 기준, 내국인)으로 용인시 전체 인구의 2.1%를 차지한다. 남자는 9,102명, 여자는 9,347명이며 세대수는 7,442세대이며 외국인은 74명이다.[4] 죽전2동의 인구구조는 유소년인구비율이 16.1%, 노인인구비율이 9.0%이다.[5]

죽전3동 편집

교육 기관 편집

아파트 편집

단지명 건설사 시행사 주소 입주 비고
꽃메마을 현대홈타운 4차 3단지 현대건설 현대6차 죽전연합주택조합 수지구 죽전로 87 2004년 6월
꽃메마을 현대홈타운 4차 4단지
꽃메마을 현대홈타운 4차 2단지
대지마을 현대홈타운 2차 현대건설 서산주택조합 수지구 현암로 54 2001년 8월
대지마을 현대홈타운 3차 2단지
새터마을 힐스테이트
인현마을 힐스테이트 7차 1단지 현대건설 디엠산업개발 수지구 탄천상로 6 2004년 9월
꽃메마을 아이파크 현대산업개발 아이파크 죽전연합조합 수지구 죽전로 121 2004년 7월

기타시설 편집

교통 편집

도로 편집

지하철 편집

문화재 및 유적 편집

수지구 죽전동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으로 선사유적과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의 고분군이 있고 고려청자를 비롯한 각종 도기를 굽던 가마터 즉, 요지 등이 있는데 특히 죽전동 선사유적은 세 곳에 분포되어 있어, 죽전택지개발지구 내 현대홈타운 건설부지 일원의 '선사유적1', 죽전동 898-2 일대의 '선사유적2', 죽전동 산7 일대의 '선사유적3'으로 구분한다. '선사유적1'은 조사자에 의해 일명 ‘대덕골 유적’으로 명명되었다.

‘대덕골 유적(龍仁 대덕골遺蹟)’으로 불리는 수지 죽전동 선사유적은 2002년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오리역 - 죽전역 간 복선 전철 건설공사 구간에 대한 지표 조사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2003년 용인 지역 광역지표 조사 때 발굴되었고 새터마을과 무지개공원, 대덕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제일 먼저 발견되어 일명 ‘죽전동 대덕골 유적’으로 불리는 이곳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대덕골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움집, 삼국시대 토광묘와 석곽묘, 조선시대 수혈유규와 분묘가 조사되었다.

학계에서 '죽전동 선사유적1'로 분류하는 '선사유적1'은 경기도 용인시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의 경계를 이루는 구릉성 산지에서 남쪽으로 흘러나온 가지능선부에 해당하며 해발고도는 약 95m 내외이다.

시차를 두고 나중에 발견된 '죽전동 선사유적2'는 성남시에서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 방향으로 난 성남대로를 타고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들어서면, 도로 서편으로 의류할인매장이 위치하는데, 이 곳 뒤편의 민묘군이 들어선 작은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다.

새롭게 발견된 '죽전동 선사유적3'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용인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에서 남쪽으로 흘러나온 꽃무두리 라고 하는 작은 구릉지 상면에 형성되어 있다. 유적이 위치한 구릉 남쪽에 접해서 대지마을 중앙하이츠빌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구릉 사면 일부는 절토되어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고 구릉지 일대는 현재 모두 밭으로 경작 중에 있다.

한강유역의 백제의 초기 주거지와도 연관되어 학계의 관심을 갖게 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백제의 주거 유적지는 이곳에서 '수지 죽전동 유적'으로 불리고 있다. 2003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실시한 죽전지구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주거지 2기 및 다수의 수혈유구가 확인되었다. 주거 유적지에서는 백제토광묘도 발굴되었으며 목관(곽)묘 형태이다. 고배, 직구단경호, 심발형토기, 광구장경호가 출토되었는데 한성백제 2기에 해당한다.

또한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었던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고분군이 있다. 위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의 경계를 이루는 숫돌봉에서 서편으로 흘러나간 능선부 중 해발 100m 내외의 야트막한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다.

 
신도시 면모의 단국대학교 수지캠퍼스 야경

대규모의 택지 개발과 단국대학교 수지캠퍼스의 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죽전동 요지(竹田洞 窯址)'는 '죽전동 요지1'과 '죽전동 요지2'의 두 곳으로 나뉘는데, '죽전동 요지1'은 원래 죽전동 도담마을 동쪽으로 약 500m 둔덕에 있었다. '죽전동 요지2'는 김세필 묘역(문화재자료 92호) 남단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훼멸되었다.

'죽전동 요지'로 불리는 이곳의 요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도기 가마 터이다. 현재 꽃메마을 극동 스타클래스아파트의 뒤편에 일부 남아있는 '죽전동 요지1'은 수지읍 죽전리 일대의 대규모 택지 개발 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어, 2001년 기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죽전동 요지1'에서는 고려시대 도기를 굽던 가마 유구를 확인하였으며, 다량의 도기편을 수습하였다. 가마의 바닥에서 11세기말에서 12세기 초로 추정되는 고려청자완 1점이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어 조성 시기를 고려시대로 보고 있다.

한편 2008년 10월 11일부터 해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 1,2동 주민들이 합동으로 탄천문화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대통령령 제6542호 시·군·구·읍·면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 1973년 3월 12일 제정.
  2. 용인시 통계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2015. 2월말 용인시 읍면동별 내국인 인구 구성비
  3. 용인시 통계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2015. 2월말 용인시 읍면동 연령별 인구 현황
  4. 용인시 통계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2015. 2월말 용인시 읍면동별 내국인 인구 구성비
  5. 용인시 통계바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2015. 2월말 용인시 읍면동 연령별 인구 현황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