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록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최경록(崔慶祿, 1920년 9월 21일 ~ 2002년 9월 3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정치가이다.

최경록
崔慶祿
대한민국의 제22대 교통부 장관
임기 1974년 9월 18일 ~ 1977년 11월 17일
전임 김신
후임 민병권
대통령 박정희
총리
역대 국무총리
차관
역대 교통부 차관

신상정보
출생일 1920년 9월 21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사망일 2002년 9월 3일(2002-09-03)(81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력 공화당 당무위원(1968년)
공화당 탈당(1973년)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민정당 당무위원(1986년 1월)
민정당 탈당(1986년 2월)
국민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1986년 3월)
국민당 탈당(1986년 8월)
신민공 상임고문(1988년 1월)
신민공 탈당(1988년 2월)
자민련 전임고문(1996년 1월)
자민련 탈당(1996년 3월)
정당 무소속
본관 해주(海州)
배우자 전자순(田慈洵)
자녀 2남 2녀(그 중 차남 최상규)
친인척 정지혜(차자부)
정일권(사돈)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2년 ~ 1945년(일본제국 육군)
1946년 ~ 1961년(대한민국 육군)
근무 육군본부
최종계급 일본제국 육군 준위
대한민국 육군 중장
지휘 육군참모총장
주요 참전 한국 전쟁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196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생애 편집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경주를 거쳐 황해도 해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5년 충청북도 음성 향리에 귀향한 이후 줄곧 충청북도 음성에서 자랐으며 일본 도요하시 중학교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조선경비보병학교를 거쳐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과 대한민국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학위 취득을 거쳐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정치학 석사 학위 취득하였다. 1949년 송악산 5·4 전투 당시, 유명한 육탄10용사를 배출한 육군 제11연대의 연대장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에 육군 제11연대를 이끌고 고랑포 전투(1950년 6월 25~26일)에 참여하였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한 헌병사령관이었다. 1950년 민주국민당 의원이었던 서민호가 기생집에서 현역 육군 대위를 사살하자 이승만은 사형을 선고한 뒤 자비를 베풀어 사형을 면제시키는 것처럼 하려 하였으나 육군 준장 최경록을 비롯한 군관과 법관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들에 대한 인사보복으로 대응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발포 명령에 대하여 최경록은 발포를 중단하도록 만류하였다. 4.19 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군의 숙정과 관련한 미국 측의 간섭을 일언지하에 거부해서 "파머 사건"을 겪었다. 1960년 5월 2일, 허정(許政)은 최경록을 육군참모총장에 채용하려 하였으나,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과 인연이 있던 최경록은 허정의 참모총장직 제의를 사양하였었다. 1960년 8월 23일 장면은 국군 인사를 단행, 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이듬해 1961년 5월 22일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 최경록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1]:96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 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 장군의 군정 연장 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2] 1967년 10월 7일 상오, 박정희 대통령은 최경록 멕시코 대사 등 8명의 신임대사에게 신임장을 각각 수여했다.[3] 1974년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직 시 발생한 이리역 폭발 사고(1977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80년 9월 국무회의에서 주일 대사로 임명되자, 8월 13일 국회사무처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1987년 9월 17일부터 1988년 4월 28일까지 제24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오랜 군, 관 생활을 통해 강직과 청렴이 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2002년 9월 3일 배우자 전자순(田慈洵) 여사와 2남 2녀를 남기고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4][5][6]

가족 관계 편집

  • 아내 전자순(田慈洵)과 2남 2녀

학력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 “백악관앞에서데모”. 경향신문. 1963년 3월 22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 “8大使에信任狀”. 경향신문. 1967년 10월 7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駐日大使 崔慶祿 씨”. 매일경제. 1980년 8월 13일. 
  5. “駐日大使 崔慶祿 씨”. 동아일보. 1980년 8월 13일. 
  6. “얼굴 崔慶祿 駐日大使”. 동아일보. 1980년 8월 13일. 

외부 링크 편집

전임
최영희
제13대 육군참모총장
1960년 8월 29일 ~ 1961년 2월 16일
후임
장도영
전임
배의환
제6대 주 영국 대사
1971년 10월 ~ 1974년 10월
후임
김용식
전임
김신
제22대 교통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7년 11월 17일
후임
민병권
전임
김정렴
제7대 주 일본 대사
1980년 9월 ~ 1985년 10월
후임
이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