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북관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행주대첩
임진왜란의 일부

행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기념비
날짜1593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
장소
결과 조선군의 결정적 승리( 행주대첩 이후 2개월 후, 왜군 한양 철수
교전국
지휘관

조선
전라도순찰사 권율
병사 선거이
창의사 김천일
조방장 조경
충청감사 허욱
조방장 배흥립
경기수사 이빈
승병장 처영

수군 정걸

일본
우키타 히데이에 (WIA)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오타니 요시쓰구
호소카와 다다오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마시타 나가모리
마에노 나가야스
나카야 센시로 
아카시 요에몬 

도자키 히코에몬노조 
병력
관군: 3,000여 명
의병: 6,000여 명
30,000여 명
피해 규모
130명 추정 불명

배경 편집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조명연합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이때 권율은 이순신에게 여러 가지 무기를 제공받았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대파하고 한양(현재의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전투 과정 편집

 
행주대첩에서 활약한 조선군의 화차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관군 3,000여명과 의병 6000여명 등 병력은 총 9,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의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말이 좋아 산성이었지 높이가 120 m 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였고 지대 역시 험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은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채 싸움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조선군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비격진천뢰 및 신기전 같은 최신 무기들과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그리고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까지도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을 모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최소 10,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비격진천뢰,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각종 함포들(천자총통 등)도 맹활약한 바 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전투 후 편집

권율은 농성에 성공하긴 했으나, 곧 행주산성을 버리고 김명원과 합류하였다.

행주치마 편집

행주대첩이 일어났을 때, 행주산성에서 여성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진짜 있었던 일이 아닌, 민간어원설이다. 실제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언어학 이론인 화용론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행주치마를 민간어원설 곧 민담에 근거한 언어라고 판단한다. (조남호 외, 《언어와 의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존재[1]하였기 때문인데, 무려 행주대첩이 있기 76년 전이다.

행주치마의 어원은 행자쵸마에서 비롯되었다. 쵸마는 치마를 뜻하고, 행자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1.절에서 식사공양 등을 하는 행자승들이 걸치던 덮치마 라는 것이 하나이고, 2.닦는 헝겊이라는 의미의 '말포抹布'를 의미한다는 것이 또 다른 설. 그럼 반대로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이 나온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낭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행주(幸州)라는 지명은 고려초기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동래성 전투에서 비슷하게 나온다.(정사 내용이다) 정확히는 여인 2명이 기왓장을 던져서 일본군과 싸우는 내용이다. 참고로 송공단에 있는 의녀비들이 바로 2 여인의 기리는 비이다.

여기서 영향을 받아서 나온 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된다.


각주 편집

  1. 사성통해(四聲通解, 1517년 편찬, 최세진)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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