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흡(和洽, ? ~ ?)은 중국 후한, 의 관료로, 양사(陽士)며 여남군 서평현(西平縣) 사람이다.[1]

행적 편집

젊어서는 허자장, 번자소(樊子昭)와 함께 명성이 있었다.[2] 후한 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또 대장군에게 벽소를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으며, 고향 군 사람 원소가 여남군의 사대부를 불러모으자 오히려 이를 피하고, 형주자사 유표가 야심은 없고 선비를 아낀다고 여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에게서는 상객으로 예우받았으나, 화흡은 유표는 참언을 들으면 자신을 지켜줄 수 없으리라고 여기고 무릉으로 피했다.[1]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쳐 형주자사 유종의 항복을 받아내고, 화흡을 불러 승상연속으로 삼았다. 당시 모개최염이 인사를 주관하면서 절검을 제일로 삼는 것을 비판하여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지적했다.[1] 건안 18년(213년) 11월에 상서와 시중, 6경이 설치되면서[3] 왕찬, 위기, 두습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4][1] 나중에 모개가 조조가 최염을 주살한 일에 불만을 품자[5] 조조는 이에 대한 고발을 받고 대노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모개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막으려 혔다. 화흡은 환계와 함께 모개를 구할 것을 청했고,[5] 또 고발한 자를 밝히고 분명히 일을 처결할 것을 구했으나,[1] 조조는 결국 모개를 파면시켰다.[5]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손에 넣자, 한중 땅을 버리고 주민들을 이주시켜 수비 비용을 절약하자고 주장했다.[1] 조조는 이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건안 24년(219년) 한중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켰다. 낭중령이 되었다.[1]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되자, 광록훈이 되었고 안성정후에 봉해졌다. 명제가 즉위하고서는 서릉향후로 봉작이 올랐으며 2백 호를 받았다.[1] 후에는 태상으로 전임했으나, 청빈을 지켜 밭과 집을 팔아 생활을 유지했고, 명제가 이를 듣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다.[1] 죽어 시호를 간후(簡侯)라 했고, 아들 화리(和离)가 뒤를 이었다.[1]

가계 편집

 

각주 편집

  1. 진수, 《삼국지》 권23 화상양두조배전
  2. 범엽, 《후한서》 권68 열전제58
  3. 진수, 《삼국지》 무제기
  4. 손성, 《위씨춘추》 (진수, 《삼국지》 권1 무제기에 주석으로 인용)
  5. 진수, 《삼국지》 권12 최모서하형포사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