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이형주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다른 뜻|집현전 (중국)|고려,조선의한국의 집현전|중국의 집현전}}
'''집현전'''(集賢殿)은 정이품아문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이자, 왕실 연구기관이다.
 
5번째 줄:
[[중국]]에서는 [[한나라]]·[[위 (삼국)|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집현전)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년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ref> 《[[동사강목]]》 도하 관직 연혁도 학사 연혁. </ref>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조선 세종|세종]] 2년([[1420년]])에 확대·개편하였다.<ref> 《세종실록》 권7, 세종 2년 3월 16일 갑신일 조. </ref>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과 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