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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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시대 ====
 
이복 형인 [[조선 광해군|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는 [[사옹원]](司饔院)과 [[종부시]](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를 맡았다<ref name="guk"></ref>. 그러나 [[1612년]](광해군 4년) 길에서 조정의 대간을 보고도 아무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가 탄핵을 받고<ref>《조선왕조실록》광해 59권, 4년(1612 임자 / 명 만력(萬曆) 40년) 11월 1일(신묘) 4번째기사</ref>, [[1615년]](광해군 7년) [[음력 8월 2일|음력 윤8월 2일]]에는 역모에까지 몰렸으나 모두 광해군의 비호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 94권, 7년(1615 을묘 / 명 만력(萬曆) 43년) 윤8월 2일(병오) 17번째기사</ref>.
 
인성군은 [[조선 선조|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와 그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폐위 및 사사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두 사람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에는 먼저 영창대군의 사사를 적극적으로 간하면서<ref>《조선왕조실록》광해 68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7월 25일(신사) 1번째기사</ref>, 영창대군의 죄를 논하는 데에 참석하지 않은 종친들을 파직시킬 것을 간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 69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8월 6일(신묘) 1번째기사</ref>. 또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종실들을 이끌고 인목왕후의 폐출을 앞장서서 간하기 시작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 12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1월 25일(병술) 10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광해 12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월 5일(을축) 1번째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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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 시대 ====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지난 날 [[인목왕후]]의 폐위 등에 동조했다 하여 그 처벌이 논의됐으나 [[조선 인조|인조]](仁祖)가 윤허하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275&mobile&categoryId=200001080 두산백과 《인성군》]</ref>. 또 인조는 인성군을 항상 숙부(叔父)라고 부르며 예우를 하였다고 한다<ref name="guk"></ref>. 그러나 이 해에 출근하던 [[사헌부]]의 관리들이 길에서 자신을 보고도 피하지 않자 이를 문제삼고 감찰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는데, 이것이 [[헌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부로 꾸짖고 욕보이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인조의 비호 아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2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8월 23일(신사) 1번째기사</ref>.
 
그러나 이듬해인 [[1624년]](인조 2년) [[음력 11월]]에 폐위된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7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1월 8일(무오) 2번째기사</ref>.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였으나, [[조선 인조|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해서 처벌을 미뤘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7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2월 6일(병술) 1번째기사</ref>. 그러나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음력 2월]]까지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한 인조는 [[1625년]](인조 3년) [[음력 2월 23일]] 인성군을 유배령을 내렸다. 다만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도록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3일(임인) 1번째기사</ref>. 이틀 후인 [[음력 2월 25일]] 인성군은 [[강원도]] [[간성군]](杆城郡)에 안치되었는데, 이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군|해평도정]](海平都正)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 아니라<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5일(갑진) 1번째기사</ref>, 다음날에는 인성군에게 [[평교자|교자]](轎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주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6일(을사) 1번째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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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해 [[음력 10월 18일]] 검열<ref>[[예문관]]에 속한 정9품의 관직명이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1740000 네이버 어학사전 〈검열2〉] 참고</ref> [[목성선]](睦性善), 승문원 부정자<ref>[[승문원]] 등에 속한 종9품의 관직명이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17688700 네이버 백과사전 〈부정자〉] 참고</ref> [[유석 (조선)|유석]](柳碩) 등이 인성군에게는 죄가 없으니 방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0월 18일(계사) 2번째기사</ref>. 게다가 전날인 [[음력 10월 17일]]에는 인성군의 유배지에 다녀온 아들 [[해평군|해평도정]]이 인성군이 병으로 고통스러워 함을 설명하자, [[조선 인조|인조]]는 인성군에 대해 석방을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0월 18일(계사) 3번째기사</ref>. 그러나 곧바로 대간에서 목성선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연이어 반박을 해 대는 바람에<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0월 30일(을사) 2번째기사</ref>, 인성군은 석방되지 못하고 [[원주시|원주]](原州)로 이배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1월 15일(경신) 1번째기사</ref>. 이후 인조는 인성군에게 지속적으로 의원과 약, 옷감 등을 보내주었고<ref>《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17일(정해) 1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인조 14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8월 9일(무신) 1번째기사</ref>, [[1626년]](인조 4년) [[음력 11월 1일]] 인성군의 생모 [[정빈 민씨]]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성군을 석방토록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4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11월 1일(경오) 2번째기사</ref>.
 
그러나 불과 1년 여밖에 지나지 않은 [[1628년]](인조 6년) [[음력 1월 3일]], 당시 세마<ref>[[세자]] [[익위사]]에 속한 정9품의 관직명이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21545600 네이버 어학사전 〈세마1〉] 참고</ref> [[허유]](許逌) 등을 비롯한 이들이 일으킨 역모에 인성군도 참여했다는 고변이 또 들어왔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3일(을축) 4번째기사</ref>. 이때는 [[인목왕후]]까지 나서서 인성군의 처벌을 주청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20일(임오) 1번째기사</ref>, 종실들도 매일같이 [[조선 인조|인조]]를 찾아와 인성군의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20일(임오) 2번째기사</ref>. 결국 인성군은 [[음력 1월 21일]] [[전라도]] [[진도군|진도]](珍島)에 안치되었고, 다만 그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21일(계미) 2번째기사</ref>. 이후 대신들은 계속해서 인성군의 사사를 청하기 시작했고<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5월 2일(임술) 2번째기사</ref>, 결국 인조는 [[음력 5월 14일]] 인성군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5월 14일(갑술) 1번째기사</ref>. 인성군은 6일 후인 [[음력 5월 20일]]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ref name="guk"></ref>.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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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인성군이 궁을 나가 살던 지역을 "인성붓재"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을 한자로 바꿔 "인성현(仁城峴)"으로 부르다가, 이것을 줄여 "인현(仁峴)"이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인현동]]의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03433&mobile&categoryId=2295 네이버 지식백과 〈소인현동〉]</ref>.
 
* 인성군의 막내아들인 [[해양군]](海陽君)은 [[제주도]]로 이배되었을 당시 자신이 제주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문집 《[[규창집]](葵窓集)》에 기록하였다. 이는 현재 당시의 제주도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ref>[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701672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인성군 가족 유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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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인성군은 [[해평 윤씨]] [[윤승길]]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낳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6658&mobile&categoryId=2970 《국조인물고》〈윤승길〉]</ref>. 장남은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진 이길(李佶)이며, 차남은 [[해안군 (이억)|해안군]](海安君)에 봉해진 이억(李億)이다. 해평군과 해안군은 모두 [[조선 선조|선조]]와 [[순빈 김씨]](順嬪 金氏)의 아들 [[순화군]](順和君)의 양자로 들어갔다. 한편 3남은 [[해원군]](海原君) 이건(李健), 4남은 [[해령군]](海寧君) 이급(李伋), 5남은 [[해양군]](海陽君) 이희(李僖)이다<ref name="guk"></ref>.
 
한편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 (1914년)|이재형]](李載灐)은 인성군의 후손이다<ref>[http://www.rfo.co.kr/html/pachong_view.php?mode3=history&No=90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인성군파 약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