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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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 기간중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서 패배한 부왕 장 2세가 잉글랜드의 포로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왕태자가 그대로 섭정이 되어 어려운 국정을 맡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한 피폐가 극에 달하였고, 대제후(大諸侯) 그중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왕족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샤를 드 나바르]]<ref>[[나바라]]왕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카를로스 2세]](에빌 백작 샤를)</ref>의 회책에 괴로워했다. 에티엔느 마르셀 지휘하의 파리 반란 및 [[자크리의 난]]을 진정시키고 부왕의 포로가 된 직후 맺었던 런던조약의 비준 및 실행을 거부하고 잉글랜드와 새로이 [[브레티니-칼레 조약]](1360년)을 맺는 데 성공했다.
현재 세금의 기초가 된 정기적인 임시징세를 실시하여 [[상비군]], 관료층을
군사면에서는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중용하여 잉글랜드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려는 행동을 시작했다. 코쉬레르 전투(1364년)에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았던 샤를 드 나바르의 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카를로스의 프랑스 왕위요구을 단념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프랑스의 왕족 에빌백으로써 노르망디에 갖고 있던 영토를 빼앗게 되어 이곳을 잉글랜드의 교두보이자 진행로로 쓰이는것을 방지했다. 물론 그 댓가로 카를로스는 남 프랑스에 영지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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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또한 브레티니-칼레 조약으로 인한 휴전으로 해고되면서 사회불안<ref>르티에 및 에코르쉬르(생필품도둑)이라 불리는 도적화된 용병이 약탈행위를 벌여 치안을
한편 해상에선 [[슬로이스 해전]]이래 괴멸상태에 있던 프랑스 함대을 재건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병기공장 크로-데-갈레을 부지런히 움직여 많은 함선을 건조시켰고 또한 프랑스 제독직을 프랑스 대원수와 동등한 특권을 가지는 직책으로 부활시켜, 장 드 비엔느을 그 직위에 임명했다. 드 비엔느는 그의 부관 에티엔느 뒤 무스티에와 더불어 화이트섬 및 라이, 빈체르시, 포츠머스, 헤이스팅그스,
병약하여
그가 칼레-바이욘느, 보르도<ref>실질적으로 잉글랜드군이 주둔하여 점령한 세르부르는 에빌백 이었던 샤를이 갖고 있던 것이었고, 또한 브레스트도 브르타뉴공 장의 토지였다.</ref>의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정전을
막대한 장서를 보유하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그외에도 톨레도 사교(司敎)였던 에비라르 트레몽고잉에게 명하여 정치적 팜플렛인 [[과수원정의 꿈]], [[늙은 순례자의 꿈]] 등을 출판시켜, 프랑스 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다.
프랑스 왕가의 문장을 변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은 백합문장(백합꽃을 무수히 흩어뿌렸던 문장)에서 백합꽃 3개을 나란히 한 문장으로 변경했다.
화폐정책에 있어서 리지부 사교 니콜라 오렘의 학설을 따라 화폐가치을 안정시켜 귀금속 함유율이 높은 통화을
치세하의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가는 교회대분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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