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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록 ==
{{인용문2|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독립기념관]] 〈단장지통〉어록비》}}
{{인용문2|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인용문2|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면서》}}
{{인용문2|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1930년]] [[1월 24일]]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말》}}
{{인용문2|본년 8월 이래로 적의 독균이 간도에 파급되어 슬프다! 우리 무고한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이렇게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 를 깎는데 옷 없고 집 없이 길에서 굶어 죽는 자 얼마인가. 종이조각에 대한 두 글자만 나타나도 그 집은 잿더미가 되고 탄피의 빈 껍질 하나라도 들어나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니 모든 사랍이 입을 봉하고 서로 눈 질만하고 있다.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학교 를 헐어 문명을 박멸하니 천인이 공노하고 있는도다.우리 군정서는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 4,5일에 적의 연대장 이하 수십 명의 장교와 1천2백 명의 병졸 을 죽였다. 그러나 부득이 험악한 산중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재기의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정의를 보고 용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대의를 저바릴 것인가. 이 격문이 이르는 날부터 각기 정의를 분발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다 함께 함몰되어 가는 민족과 조국을 건져내어서 대한 광복 의광복의 대업을 조속히 완성합시다.|《[[간도 참변]] 이후 김좌진의 군정서 격고문》<ref>[(http://www.kimjwajin.org/kim/war_jayu.php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ref>}}
 
== 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