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F-2: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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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위 노력에 대한 요구가 촉구된 최대 이유는 당시 일본 경제의 "호조"를 넘어선 "일인 독주"라는 상황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매년 갱신을 거듭했으며, 일본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수출 일변도의 세계 독주를 감행했다. 그렇지만, 무역 입국(貿易立國)인 일본은 상품을 계속해서 수출하지 않으면 경제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편, 미국은 "자유무역의 수호자"로서 이를 방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했다. 더욱이 일본 상품이 하이테크 분야로 이전해 간다고 하는 새로운 문제까지 떠올랐다.
 
==== 일미미일 무역 마찰 ====
 
[[1982년]]에 제출된 "미국의 하이테크 사업 경쟁력 평가" 보고서에서는 "최첨단기술산업 성장율은 전산업 성장율의 두 배로 전기술분야 진보에 공헌하고 있으며, 이 분야는 국가안전보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라는 하이 테크 분야의 관리 무역이 국익으로까지 연결된다는 언급이 존재했다. 당초, 레이건 정권의 고금리 정책으로 달러고가 초래되었고, [[1985년]] "선진 5개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회의(G5)"에서 달러 고정화가 합의([[플라자 합의]])되어 각국 협조로 달러 안정화 유도가 이루어졌다. 당시까지의 1달러 240엔에서 1달러 120엔으로 엔화가 급등, 일시적으로 엔고 상황까지 발생했지만, 미국 제품의 국제 경쟁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가격뿐만 아니라 미국 제품 자체가 더 이상 소비자 기호에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를 개선하지 않는 한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통화율이 배가 되었음에도 적자가 감소하지 않자 미국은 일본에 강한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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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노믹스]]"라는 "군비 확장에 따른 공공투자"에 의한 재정 적자 확대와 국내 소비 과다에 의한 무역 적자 누적이라는 소위 "쌍둥이 적자" 그리고 투자 게임이라고 하는 불건전한 가상 게임, 여기에 시스템으로서 정점에 도달해 있던 [[상호확정파괴]](MAD)에 따른 핵 전쟁 공포는 시대의 광기와 맞물려 미국 국내 경제학자들에게 마저도 "폭거", "무법자의 만행"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수퍼 301조]] 발동을 위협 무기로 들고 나온 미국과 그에 저항하는 일본의 동갈전(恫喝戰)이라는 사태로 발전했다(대부분의 보복 관세 조치는 후에 철회되었다).
 
이처럼 경제 면에서는 [[1985년]]에 대일 제재 법안이 가결된 상황이었으며, 일미미일 동맹이라는 군사 면에서도 [[공화당 (미국)|공화당]]이 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라 상원, 하원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6년]] 4월에는 일본을 내방한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이 다시 "FSX 선정은 일본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말로 F-15의 페이퍼 플랜 이외에 대함 미사일 4발을 탑재할 수 있는 전투기를 미국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고성능 전투기 및 폭격기, 항모기동부대 및 원자력 잠수함을 보유한 미국에게 1기의 전투기로 그러한 성능을 바라는 일본의 일점호화주의(一点豪華主義) 식 요구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대함 미사일 4발 탑재라는 운용 요구 자체는 항공자위대 운용연구 결과 나온 수치로, 이는 소련의 침공 시 보유기로 건곤일척(建坤一擲)의 대함 공격을 가할 경우 [[일본판 오케안 연습]]을 재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대함 미사일 4발 탑재가 불가능한 경우, [[지원전투기]] 정수 증가 및 신편, 배치 기지 자체의 신설 등 [[자위대]]라는 조직 자체를 재편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미국이 지도할 일 따위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경제 문제에서의 무역적자 해소와 미국제 전투기 구입 그리고 상호운용성을 바탕으로 미국제 전투기를 개조 모체로 하라는 요구는 때론 상호 연관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별 사안으로, 당연히 각각의 비중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총액 1조 엔에 이르는 FSX 프로젝트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지만, 1985년에 미국 경제연구소가 한 "일본이 무역 장벽을 완전 철폐하면 세계의 대일 수출은 연간 220억 달러 증가한다"라는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역 적자를 병기 수출로 메운다고 하는 방안 자체가 매우 유치한 발상이었다. [[1987년]] 레이건 정권 당시 [[도시바 기계 코콤 위반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 국내 기업 및 노조에 지원을 받은 하원의원이 관련 발언을 하면서 이후 일본은 미국제 전투기 수입 및 무개조 라이선스 생산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지 못하게 되었다(무개조 라이선스 생산은 당연히 일본에서 유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