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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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甲戌換局)은 [[1694년]]([[조선 숙종|숙종]] 20년) [[노론음력 4월 1일]]에 발생한 [[김춘택조선 숙종|숙종]](金春澤) 시대의 3차 환국으로, [[소론기사환국]]이 발생한 [[한중혁1689년]](韓重爀) 등이2월 숙종의2일 폐비(廢妃)인이후로 정권을 집권해온 [[인현왕후|민씨남인]] 복위몰락하고, 운동을 일으키자[[기사환국]] 이를 계기로몰락했던 [[남인서인]]([[민암노론]]·[[소론]](閔黯)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당한재집권한 사건이다.
 
== 과정 ==
숙종이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차 1694년 김춘택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하였다. 민암 등 남인 일파는 이를 계기로 소론의 대두를 막으려고 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 이의징 등을 사사하고 [[장희빈]]의 오라비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에 원방부처하는 등 남인 일파들을 일거에 축출했다.
[[조선 숙종|숙종]] 20년([[1694년]]) [[음력 3월 23일]], [[민암]](閔黯)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宦官)·폐인(嬖人)<ref group="주석">폐인(嬖人)은 후궁을 일컫는 단어로, 당시 시점에선 [[조선 숙종|숙종]]의 유일한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를 지목한다.</ref>과 척가(戚家)<ref group="주석">왕실의 내외척을 가리키는 단어로, 실록의 당일 기사에선 장희재만 지목했지만 해당 사건의 모든 관련 기사에는 [[조선 숙종|숙종]]의 세 고모(숙안, 숙명, 숙휘)들이 함께 등장한다.</ref>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風聞)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든다는 함이완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토록 허가하고, 특별히 엄한 형벌을 쓰라고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3일(신유) 1번째기사</ref> 3월 25일, 왕비 장씨([[희빈 장씨]])의 오라비인 우윤 겸 포도대장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소론]]과 친분이 있어 왕래해온 것을 사죄하며 사직서를 제출하였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곡절이 있을 테니 작은 일에 불안해하지 말라며 위로했다.<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3월 25일 (계해) 원본356책/탈초본18책 (16/20)</ref> 장희재의 뇌물수수 혐의는 26일의 국문 과정 중에 장희재가 자리에 있었으나 뇌물은 받지 않았다는 죄인 측의 증언으로 무죄판결되었다.
 
3월 26일, [[한중혁]](韓重爀)·[[김춘택]](金春澤)·이진명(李震明)·이후성(李後成)·이기정(李起貞)·김도명(金道明)·이동번(李東蕃)·변진영(邊震英)·유복기(兪復基)·이시도(李時棹)·이시회(李時檜) 등이 체포되었다. 이 중, 지방 거부(巨富) 출신 무인(武人) [[이시도]]가 [[한중혁]] 부자(父子, [[소론]])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한중혁]]이 [[남인]]의 삼대장(三大將: 훈련 도감·수어영·금위영)이 종실 [[의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고 고발하여 [[남인]]을 제거하려고 했음을 무고하니, [[조선 숙종|숙종]]이 분개하여 국청이 더욱 확대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6일(갑자) 2번째기사 </ref> 이 과정 중, 피의자들이 [[조선 효종|효종]]의 딸이자 [[조선 숙종|숙종]]에겐 고모가 되는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가 [[노론]]의 대표인 [[김춘택]]과 손을 잡고 환국 도모에 동참했음을 내세우자, [[민암]]을 위시한 [[남인]]이 세 공주를 엄히 다스릴 수 밖에 없음을 일제히 상소하여 [[숙안공주]] 자매는 물론 [[조선 숙종|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의 유가족조차 화(죽음)를 피하기 어려워졌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ref>
 
3월 29일, 유생 김인이 고변서를 올려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와 훈국 별장(訓局別將) 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反逆)을 도모하는데 장희재도 참여하였으며, 민암(閔黯)·오시복(吳始復)·목창명(睦昌明)도 서로 연결(連結)되어 있는 것을 들은 것과 장희재가 [[숙빈 최씨]](당시 숙원)의 외숙모 일가에게 돈을 주고 독살을 하려고 했던 것을 목격했다고 고발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9일(정묘) 1번째기사 </ref> 이에, [[민암]] 등이 [[조선 숙종|숙종]]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였으며 [[조선 숙종|숙종]]은 김인의 고변이 허황되어 믿지 않는다며 이들을 위로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3월 29일(정묘) 3번째기사 </ref>
 
그러나 다음날인 음력 4월 1일<ref group="주석">1694년은 윤달 탓에 음력 29일이 3월의 마지막 날이다.</ref>, [[조선 숙종|숙종]]은 돌연 [[민암]] 등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서인]]에게 다시 정권을 주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1번째기사~5번째기사 </ref>
 
== 원인 ==
갑술환국의 원인은 기록이 불분명하기에 정확한 정의가 내려지고 있지 않고 의견만 분분할 뿐이다. 일설에서는 [[조선 숙종|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벌인 것으로 정의하지만 이는 인현왕후의 입장에서 쓰여진 소설 인현왕후전과 야사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승정원일기》 등 정사에 기록된 팩트(fact)를 순차별로 확인해 비교하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조선 숙종|숙종]]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 변화로 환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특정한 원인이 없이 두 여인의 당파를 번갈아 기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여파 ==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한 [[조선 숙종|숙종]]은 4월 2일<ref>《숙종실록》에는 음력 4월 1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4월 2일 기사로 기록되어 있다.</ref>, 폐인(廢人: [[인현왕후]])을 언급하는 자와 왕세자의 신위에 위협이 되는 발언을 하는 자는 무조건 대역죄를 묻겠다고 선포하여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확고히 피력했다.
 
{{인용문|“거센 신하의 흉악한 잔당으로서 국본(國本: 왕세자)을 동요하는 일이 있는 자와, 폐인(廢人)【중궁(中宮)을 가리킨다.】·홍치상(弘致祥)<ref group="주석">[[조선 숙종|숙종]]의 고종형으로 [[숙안공주]]의 아들이자 [[조선 숙종|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1688년에 처질녀인 [[영빈 김씨]]와 함께 [[희빈 장씨]]의 어미와 [[조사석]]에 대한 거짓 추문을 만들어 퍼트린 것이 [[기사환국]] 후 [[남인]]의 정치적 보복의 일환으로 [[김만중]]과 [[이사명]]이 취조하던 과정 중에 드러나 [[영빈 김씨]]는 폐서인이 되었고 [[홍치상]]은 다른 여죄(무고 3차례)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ref>·이사명(李師命)<ref group="주석">노론4대신인 [[이이명]]([[김만중]]의 사위)의 형이자 [[이관명]]의 사촌형으로, [[경신환국]] 때 [[김석주]], [[민정중]], [[김만중]]과 함께 [[남인]]에 대한 편파적 강경 처벌을 행하였으며, 이 과정 중에 간계를 서슴치 않았기에 [[남인]]의 원한을 받았다. 왜인과 내통한 혐의로 구속되어 국문되다가, 인척인 [[홍치상]]과 함께 종실 [[동평군]]을 시역죄로 무고하려 했던 사실이 발각되고, 사돈인 [[김만중]]이 1688년 대내에서 [[조선 숙종|숙종]]을 조롱했던 [[조사석]]의 추문이 [[홍치상]]에 의해 만들어져 이사명이 [[김만중]]에게 전달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처참되었다.</ref> 등을 위하여 신구(伸救)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논할 것이고, 이상(李翔)<ref group="주석">[[인현왕후]]의 언니의 시숙이자 [[인현왕후]]의 외사촌오빠인 [[송병문]]([[송준길]]의 손자)의 장인이고 [[김제겸]]([[김수항]]의 손자. [[김창집]]의 아들)의 처조부이다. 숙종실록보궐정오에 수록된 "민진후(閔鎭厚)가 그(李翔)의 인척(姻戚)이란 이유로 사정(私情)에 끌려서 금령(禁令)도 마음에 두지 않고 곧바로 신설(伸雪)을 청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와하였다." 문구는 이들의 관계가 특별했음을 드러낸다.</ref>을 위하여 신구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결단할 것이다. 이 뜻을 중외(中外)에 명백히 포고하라.”|《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5번째기사 }}
 
또한, 갑술환국이 발발한 4월 1일, [[남인]]이 대거 엄형을 받고 출척되는 상황에 [[민암]]과 오랜 친분이 있어온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스스로 죄를 청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라며 위로하였다.<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일 (무진) 원본356책/탈초본18책 (6/10)</ref>
 
그러나 4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이 돌연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직권남용의 죄<ref group="주석">국청죄인 [[이시도]]가 유배형을 받고 밤중에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집에 종복 4명을 동행하고 찾아가 칼을 들고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암살을 꾀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장희재 (조선)|장희재]]는 이를 관청에 알리지 않고 [[이시도]]를 포청으로 보내 형벌을 써서 배후를 묻게한 후 조용히 방면해주었다. 풀려난 [[이시도]]는 즉시 [[사헌부]]로 출두하여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장희재 (조선)|장희재]]의 사가에 들렀는데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위로하며 송별주를 대접하기에 얻어마시다가 별안간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가슴을 얻어맞고, 죄없이 끌려가 형장을 맞은 탓에 발가락이 부러졌음을 고발했다. 이를 조사한 후 승정원이 [[조선 숙종|숙종]]에게 사건을 보고하여 [[이시도]]는 유배를 떠나야 할 죄인이 포도대장의 집에 장정을 데리고 가 암살을 꾀한 죄로 다시 해부에 체포되어 엄히 국문케 하였으며, [[장희재 (조선)|장희재]]는 [[이시도]]의 범행을 국가에 고발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풀어준 것과 사사로이 형벌을 가한 죄로 임시면직의 처분을 받았다가 4월 8일 장령 유집일의 주장으로 포도대장직에서 파직되었다. 4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이 돌연 [[이시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유배를 가야 할 [[이시도]]에게 형장을 쓴 죄를 물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의금부]]로 긴급 압송했다.</ref>를 물어 삭탈관직하고 체포함<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1일(무인) 8번째기사 </ref>과 동시에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서궁(西宮)<ref group="주석">[[조선 선조|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유폐되었던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된 후 [[권대운]]을 비롯한 [[남인]]과 [[소론]]이 한때 국모였던 이를 여염에 두는 것은 왕실의 체모를 깎는 것이라 하여 폐황후를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선처했던 [[송 인종]]의 고사대로 별궁에 두고 의식(衣食)을 궁에서 책임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수차례 상소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의 완강한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술환국이 발생하고 열흘 째인 1694년 4월 9일, [[조선 숙종|숙종]]은 돌연 [[송 인종]]의 고사를 들어 폐비 민씨를 서궁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을 허가하고 수직 한 명을 붙여주었다.</ref> 입처(=이사)를 길일을 고르지 말고 당장 다음날 옮기도록 할 것과 즉시 폐비 민씨의 사제에 여러 수직(=호위)을 붙이도록 하였는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1일(무인) 3번째기사</ref>, 이는 이 날에 이르러 [[조선 숙종|숙종]]이 그녀를 복위하기로 결심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2일, [[조선 숙종|숙종]]은 폐비 민씨([[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하고, 동시에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조선의 국법을 들어 왕비 장씨([[희빈 장씨]])에게 옛 작호로 강봉하라 명한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ref> 이 사건의 내부 사정에 대해 [[민진원]]은 그의 개인저서인 [[단암만록]]에 [[숙빈 최씨]]가 한밤 중에 [[조선 숙종|숙종]]의 처소로 나아가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눈물로 호소한 것이 성공하였다고 기록했다.<ref group="주석">[[장희재 (조선)|장희재]]가 [[숙빈 최씨]]의 외사촌 형부인 해성에게 돈 50냥을 주고 [[숙빈 최씨]]의 외숙모 봉영을 입궁시켜 [[숙빈 최씨]](당시 숙원)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게 하여 독살토록 사주했다는 김인의 고변과 [[숙빈 최씨]]의 증언은 윤5월 2일 [[소론]] 측의 강경한 주장으로 압송된 [[숙빈 최씨]]의 외숙모 일가의 심문 결과, 봉영이 최씨의 출산 당시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과 궁에는 허가되지 않은 외부 음식을 들일 수 없어 고변대로의 실행이 불가능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회임 중인 왕의 유일한 후궁을 독살하기 위해 후궁에게 빌붙어 생계를 연명하던 유일한 친지에게 주었다는 단돈 50냥은 인정(人情)은 접어두고 시세와 비교해도 도저히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지적으로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다.</ref>
 
[[인현왕후]]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강봉에 대해 갑술환국을 계기로 투합했던 [[노론]]과 [[소론]]이 강경히 대립하게 되는데, 이는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목적했고,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인 상태로 별궁에 모셔 편안한 여생을 맞기만을 목적했던 탓이다.
 
{{인용문|‘노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은 폐비를 별궁(別宮)에 옮기려 한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조선 숙종|숙종]]의 복위 명령에 [[서문중]]은 [[박태상]] 등과 함께 사람을 모아 ‘9년·6년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인현왕후]]가 비록 [[희빈 장씨]]보다 더 오래 왕비로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는 뜻이다.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 </ref> [[인현왕후]]의 복위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노론]]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오가던 가운데<ref>《숙종실록》에는 누락된 내용으로 《승정원일기》 4월 12일 ~ 4월 16일까지의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ref> 4월 16일에 이르러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는데<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ref> [[조선 숙종|숙종]]이 갑술환국을 일으키며 중앙을 [[소론]] 중심으로 채웠던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이 사건은 엿새 후인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 중재하여 결국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으나, [[남구만]]이 [[인현왕후]]의 복위는 기쁘고 [[희빈 장씨]]의 강호는 슬프다고 한 표현이 [[노론]]의 비위를 거스렀고<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7일(갑신) 1번째기사 </ref>, 이후 [[인현왕후]]의 복위를 강력히 반대했던 [[소론]] 대신들을 보호하고 [[노론]]이 [[장희재 (조선)|장희재]]를 제거하는데 번번히 방해를 한 탓에 [[남구만]] 역시 [[노론]]의 당적으로 규정되고 만다.<ref group="주석">[[남구만]]은 [[인현왕후]]의 인척으로, [[인현왕후]]의 사촌올케 남씨([[민정중]]의 맏며느리. [[민진장]]의 처)가 [[남구만]]의 사촌누이이다.</ref>
 
6월 1일, [[인현왕후]]는 새로이 즉위식을 하여 왕비로 복위할 수 있었으나<ref>《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1일(정유) 3번째기사 </ref>, [[소론]]의 창시자인 [[윤증]]은 옛 왕조의 좌우황후(左右皇后)의 예를 받들어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동등히 높이고 호칭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10월 3일(정유) 5번째기사 </ref>, 우의정 [[윤지완]]은 [[인현왕후]]와 한 식구임에도 불구하고<ref group="주석">[[윤지완]]은 [[민진원]]의 장인 [[윤지선]]의 아우로, [[인현왕후]]의 둘째 올케의 숙부이다.</ref>사직서를 들고 [[조선 숙종|숙종]]과 면담하여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작위를 만들어 그녀의 지위에 합당한 예우를 올려줄 것을 청하고 수년이 넘도록 [[인현왕후]]에게 왕후의 예를 올리지 않았으며<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윤5월 27일(계사) 2번째기사 </ref><ref>《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3월 30일(신묘) 3번째기사</ref> [[서문중]] [[박만정]] 등 [[소론]]이 연이어 [[희빈 장씨]]에게 왕후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만들어 올릴 것을 상소하고, 공사(公事) 중에도 [[소론]]은 [[희빈 장씨]]에게 감히 후궁의 작호로 호칭할 수 없다 하여 모처(某處)라고 돌려 호칭하니<ref>《조선왕조실록》숙종 29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8월 3일(임진) 1번째기사</ref>, 이러한 사정은 1701년 [[인현왕후]]가 2년간의 투병 끝에 사망하여 [[희빈 장씨]]의 복위가 불가피해진 상황 속에 [[숙빈 최씨]]의 발고로 터진 [[무고의 옥]]의 배경이 되었으며, [[무고의 옥]]은 [[인현왕후]]의 당파인 [[노론]]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독점케하여 1699년을 시점으로 탕평책을 주장하던 [[소론]] [[최석항]] 등의 중재 아래 극소수 조정에 복귀했던 [[남인]]이 [[기사환국]] 당시 [[희빈 장씨]]와 간계를 꾸며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역당으로 변모되어 다시 출척되고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하기까지 정계에서 사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ref group="주석">[[조선 영조|영조]] 말년에 [[남인]]도 관직을 받았으나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하였을 당시 5품 이상의 [[남인]]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만큼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ref>, [[희빈 장씨]]의 무죄 혹은 경형을 주장했고 [[남인]]에 대한 온건 정책 및 탕평책을 주장했던 [[소론]] 역시 [[노론]]에 의해 역당의 무리로 규정되어 중형을 받고 영구히 정계에서 축출될 뻔하였기에 감정이 불구대천의 원한으로 격화되었다. 이후 [[소론]]은 왕세자([[조선 경종|경종]])를 지지하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조선 영조|영조]])을 지지하여 경쟁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 경종|경종]] 때의 [[신임사화]]와 [[조선 영조|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나주벽서 사건, 토역경과투서 사건 등의 계기가 된다.
 
 
== 기타 ==
소설 인현왕후전에선 갑술환국의 원인을 [[조선 숙종|숙종]]이 [[희빈 장씨]]의 간악함을 견디지 못해 오랜 기간 그리워했던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문정]]<ref group="주석">[[이문정]]은 [[영빈 김씨]]의 외재종동생으로, [[영빈 김씨]]의 외조부인 [[이정영]]의 아우 [[이장영]]의 손자이다. [[영빈 김씨]]의 외사촌아우이자 [[이문정]]의 재종형제인 [[이진유]] 형제가 왕세제 책봉을 반대하고 [[신임사화]] 때 [[노론]]4대신을 처형할 것을 가장 앞에서 주장했던 장본인이었기에 [[조선 영조|영조]] 즉위 후 [[노론]]의 집중 공격으로 가문이 몰락할 뻔 하였으나 [[영빈 김씨]]의 친족인 덕분인지 당사자인 [[이진유]] 형제만 벌을 받았을 뿐이다. 본명이 [[이진정]]이었던 [[이문정]]은 가문의 돌림자인 진(眞)을 문(文)으로 바꾸고 [[이진유]] 형제가 간사하여 오래 전부터 상종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희빈 장씨]]를 악녀로 묘사하고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영웅으로 미화한 [[수문록]]을 지었다.</ref>이 쓴 [[수문록]] 역시 [[희빈 장씨]]의 요악함에 질려 [[기사환국]] 직후부터 왕후 교체를 후회해온 [[조선 숙종|숙종]]이 [[희빈 장씨]]가 회임한 [[숙빈 최씨]]를 매질하여 죽이려는 것을 목격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서 쫓아내기 위해 환국을 일으킨 것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의 기록을 날짜순으로 분석하면 [[조선 숙종|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하기 위해 환국을 벌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으며, [[인현왕후]]의 복위를 전후하여 보인 [[조선 숙종|숙종]]의 행적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환국의 주범들의 처리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해졌는데, 소론의 한중혁등은 유배형을 받은데 비해, 노론의 김춘택 등은 무죄방면되었기 때문이다.{{출처}} 어쨌든 이후는 줄곧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 함께 보기 ==
* [[환국 (정치)]]
*[[예송논쟁]]
*[[홍수의 변]]
*[[삼복의 변]]
*[[경신환국]]
*[[기사환국]]
*[[숙안공주]]
 
 
== 참고문헌 ==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 《단암만록》
* 《수문록》
* 《인현왕후전》
 
 
== 출처 ==
<references/>
 
 
== 주석 ==
<references group="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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