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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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하고 [[1945년]] [[8월]] [[임영신]], [[이은혜]] 등과 함께 [[여자국민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9월 [[미군]] 주둔 후에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9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해 교장을 맡았다. 교육위원회[[9월]] 위원으로는 여자교육부문을 맡아 여자 교육의 확대를 확정시켰다. 한편미군이 [[이화여자전문학교조선]] 다시주둔하면서 대학으로미군이 승격시키기이화를 위해방문하여 노력,학교를 이화전문군용병원으로 학교를쓰려하니 종합대학으로닷새 발전시키기안에 위해건물을 전문학교비워 내에 한림원,것을 예림원,요청했다. 행림원,김활란은 등의이때를 3개회상하기를 단과대학으로'당시 나눠앞이 운영하고캄캄했으며, 종합대학의너무나도 인가를무력한 받기한국의 위해처지에 군정청슬퍼하고 관리들을분노했다'고 설득하였다한다. 그해 [[10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단호히 거절했으나 미군측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때 마침 [[서울]]에 도착한 [[미국]] [[뉴스위크]]의 기자 [[헤롤드 아이삭스]]를 설득, 그의 도움으로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를 만나 “일제 때도 내놓지 않았던 학교입니다. 지금 해방에 차있는 한국에서 한국의 고등교육기관을 내놓으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의 어떤 여자대학을 군에서 밀고 들어갔다면 어떤 여론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라고 항의했다. 하지 장군은 강제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 군인들을 위해 건물의 사용을 요청하는 것이니 동의해달라고 부탁했고, 학교를 위해서 더 좋은 장소를 물색해서 드리겠다는 약속을 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김활란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이 학교는 나의 사유재산이 아닙니다. 수많은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전국 여성의 여론을 들은 후에라야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했고, 선생의 논리적인 말에 말문이 막힌 하지는 결국 [[이화여대]]의 건물 사용을 취소했다.
 
==== 미군정 활동과 교육 활동 ====
[[1946년]]에는 여자교육담당 교육자문위원을 겸직하였다. 군정기간 중 그는 [[미군정]] 교육위원회 위원과 여자교육담당 교육자문위원을 맡아 여자 교육의 확대를 확정시켰다. 한편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다시 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 이화전문 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문학교 내에 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등의 3개 단과대학으로 나눠 운영하고, 종합대학의 인가를 받기 위해 군정청 관리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이화여대 설림의 필요성의 이유로 하나는 여자 대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세계의 대학이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전공분야를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되고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김활란은 두 개의 원칙 아래 학교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한편 [[이화여대]]를 남녀공학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올 때마다 그는 '[[한국]] [[국회의원]] 의석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는 날이 올 때까지 안됩니다.' 라며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재건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여성교육 진흥, 장려를 위한 한국여학사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이승만]], [[김구]] 등 [[반공주의자]]를 지지하여 여성의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하려 노력하였다. [[10월]]에는 [[이승만]]의 귀국을 영접하고, [[대한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으며, [[12월]] 독립촉성국민회의 여성 조직인 대한독립촉성부인회를 조직하여 이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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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 UN 대표단 파견 =====
[[1948년]]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서대문구]]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여자 후보 모두 19명 출마하여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한 점을 지적, '지식계급의 여성과 일반여성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며 여자 유권자들의 정치 참여와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제3차) 대표단에,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서 [[장면]](단장), [[장기영 (1903년)|장기영]],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 {{출처|[[모윤숙]]}}와 함께 참석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0800329102004&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8-08&officeId=00032&pageNo=2&printNo=5160&publishType=00010|제목 =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출판사= 경향신문 | 작성일자 =1962-8-8 }} </ref>[[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8년 12월 7일~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제3차) 대표단에,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서 [[장면]](단장), [[장기영 (1903년)|장기영]],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 {{출처|[[모윤숙]]}}와 함께 참석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0800329102004&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8-08&officeId=00032&pageNo=2&printNo=5160&publishType=00010|제목 =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출판사= 경향신문 | 작성일자 =1962-8-8 }} </ref>[[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49년]] [[3월]] 모교인 [[보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UN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왔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YWCA 연합회) 재단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50년]] '여학사 협회' 창립위원회 발족에 참여하여 창립위원이자,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어 [[대한민국]] 국내의 여자 학교 개교, 설립 운동을 주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