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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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바르드나제 이후의 조지아(그루지야)==
[[Image:2OP 30.JPG|thumb|[[장미 혁명]]: 시청 앞의 시위대, [[트빌리시 자유 광장]] ]]
[[
1월 4일,
새 대통령은 정부에 나타난 많은 난관들과 직면했다. 23만명이 넘는 [[국내실향민]]들이 막대한 경제적 부담감에 시달렸다. 분리주의자들의 지역인 [[압하스]]와 [[남오세티야]]의 평화는 러시아와 [[국제 연합]]에 평화유지군과 국가간 기관들에 의해서 감독되었고 상황은 위태위태했다. 수년의 경제 발전과 협상은 지역간 적대감정의 극복이 요구됐다. 상당한 경과는 남오세티야-조지아(그루지야) 충돌에 대한 협상에서 다뤄졌고 협상들은 조지아(그루지야)-압하스 충돌에 대한 협상으로 계속되고 있다.
[[Image:Saakashvili n bush.jpg|thumb|
장미 혁명 이후에, 조지아(그루지야) 정부와 준-분리주의 아자리아 지도자 [[아슬란 아바쉬제]] 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아바쉬제는 트빌리시 당국이 공문서로 [[아드자라에]] 보낸 사카시빌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양측 모두 군대를 동원했고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사카시빌리의 최종 제안과 대규모의 거리 시위대는 아바쉬제가 사임하고 조지아(그루지야)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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