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축구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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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다음 가는 권력을 누린 김형욱이 직접 팀 창단을 주도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양지팀은 중앙정보부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양지'라는 이름 자체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에서 따온 것이었으며, 선수들의 숙소도 [[중앙정보부]]가 있던 서울시 이문동에 마련했다.
 
일부에서는 양지팀을 북조선과북한과 맞대결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김형욱이 직접 창단하고 운영에 깊이 개입했던 실미도 [[684부대]]와 비교하기도 한다. (양지팀은 실미도 684부대보다 1년 먼저 만들어졌다.) 양지팀과 마찬가지로 실미도 부대는 북조선과북한과 대결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었으나, 남북 화해 분위기 때문에 본래의 목적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김형욱이라는 후원자가 실각하면서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설립===
[[1966년 축구 월드컵]]에서 북조선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전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북한 축구 대표팀]]은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꺾었고, 8강전에서 아깝게 역전패를 당했지만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 축구 대표팀]]과 대등하게 맞섰다. 북한 축구의 선전은 북한과 극심한 체제경쟁을 벌이던 대한민국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축구팀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프로 축구가 있기 전이었으므로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직적인 지원책을 강구한 것이다. [[육군 축구단]], [[해군 축구단]], [[공군 축구단]], [[해병대 축구단]]등 군에 입대한 병사 뿐 아니라 당시 입대 연령대의 축구 선수들을 모두 모아서 축구팀을 만들었고 '황금 다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최정민 (1930년)|최정민]] 감독을 초대 감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이세연]], [[김호]], [[김정남 (축구인)|김정남]], [[서윤찬]], [[정병탁]], [[김삼락]], [[이회택]], [[임국찬]]등 국내 최고의 선수들을 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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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양지 축구단은 북조선북한 축구팀과 맞대결을 해도 부족함이 없도록 훈련받았으나, 막상 양지 축구단이 운영되는 동안에는 북조선과북한과 경기를 가지지 않았다. 1960년대 끝무렵부터 북조선과북한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양지축구단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양지 축구단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형욱이 실각하면서 존폐의 위기에 몰려 결국 [[1970년]] [[3월 17일]]에 흐지부지 해체되었다.
 
양지 축구단은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체제 경쟁이라는 정치적 논리로 설립된 팀이었으나 대한민국의 축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양지에 소속되었던 여러 선수들은 축구단이 해체된 이후에도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고, 대한민국 축구가 한 단계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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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references/>
 
{{토막글|축구단}}
 
[[분류:군ㆍ실업ㆍ금융 축구 클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