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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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즉위 이전 ===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쓰십시오” 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를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은 [[용]]과 같았고 눈은 [[봉황]]처럼 부리부리했다고 한다. 그 아기가 바로 이성계이다.
 
[[고려]]의 무신(武臣)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기가 그지없어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들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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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 정부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 또한 빈번하여, 고려를 괴롭혔다. 이처럼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마침 [[1380년]] 아키바츠(阿只拔都)라고 하는 소년이 왜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하고는한다” 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키바츠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쏘아 벗긴 후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화살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의하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물들었다” 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과 김구용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 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중국]]이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을 때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있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나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는데 막상 회군하여 군사들이 강을 건너자 갑자기 강물이 밀려와 위화도가 물 속에 잠겨버렸다고 한다. 회군한 이성계는 [[고려 우왕|우왕]]을 폐위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 때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차지하리라” 라는 동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이성계가 단행한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들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는 사원 경제의 폐단과 토지 소유 등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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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왕자들의 패륜을 개탄한 태조는 [[1398년]] [[조선 정종|영안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옥새를 가지고 고향인 함경도의 [[함흥]]에 있는 자신의 별궁으로 가 버렸다. [[1400년]] [[1월 11일]] 정종의 선양(禪讓)을 받아들여 정안대군이 즉위하여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쇄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다고 한다. 가는 사람마다 죽고 돌아오지 못하니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에는 누가 가겠는가”하니가겠는가” 하니 아무도 응하는 신하가 없었으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인 박순이 자원하였다. 박순은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함흥까지 끌고 가서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인간]]의 부모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라며” 라며 태조의 귀경을 설득했다. 결국 박순은 마지막 함흥차사로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됐지만 그의 정성에 감동한 태조가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함흥차사(咸興差使)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이다. 태조에게 문안 인사를 갔던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해 소식이 없었음을 이름이었다.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 태종이 직접 교외로 나가서 태조를 맞이하려 하자, 태조의 진노가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만익의 경우에 대비하여 큰 장막을 바치는 굵고 높은 기둥을 많이 세우게 하라고 조언하였다. 태종은 그렇게 하라 일렀다.
 
그 결과 태조가 태종을 보고 별안간 활을 쏘자, 태종은 급히 순간적으로 기둥 뒤에 몸을 피해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에 태조가 “막비천운(莫非天運)이로다”하고이로다” 하고 탄식했다. 또 태종이 태조에게 잔을 울리는데, 역시 측근들이 일러준 대로 직접 잔을 따라 올리지 않고 중간의 신하에게 잔을 바치게 하자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 놓으면
서 “모두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했다. 잔을 바치는 의식이 끝나자 태조는 태종에게 옥새를 꺼내어 내던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