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 나카무라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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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나카무라 번'''({{llang|ja|相馬中村藩|소마나카무라한}})은 [[일본]] [[에도 시대]]의 [[일본의 번|번]] 중 하나로, 지금의 [[후쿠시마 현]] [[하마도리]] 북부에 위치했다. 번주을 따서 '''소마 번'''({{llang|ja|相馬藩}}), 본거지을 따서 '''나카무라 번'''({{llang|ja|中村藩}})라고도하지만 다른 "[[나카무라 번]]"과 구별 할 때 '''소마 나카무라 번'''또는 '''[[무쓰 국|오슈]] 나카무라 번'''({{llang|ja|奥州中村藩}})한다.
 
거성은 [[나카무라 성(무쓰 국)|나카무라 성]]이며, 현재 [[소마 시]] 나카무라 지구에있다. 성립에서 소멸까지 번주는 [[:분류:소마 가문|소마 가문]]이었다. 가격(家格)은 야나기노마({{lang|ja|柳間}})급 [[도자마 다이묘]]였고, 나중에 데이칸노마({{lang|ja|帝鑑間}})급 [[후다이 다이묘]]가 되었다. 공식 [[고쿠다카]]는 6만 석이었고, 막부 말기 기준 실제 고쿠다카는 약 9만 7천 석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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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소마 가문|소마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쓰 국]] [[나메카타 군 (이와키 국)|나메카타 군]]과 [[우다 군 (이와키 국)|우다 군]]에 이주하여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그 지역을 통치했으나, [[에도 시대]] 초기에 한때 위기를 맞이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소마 가문의 당주 [[소마 요시타네 (1548년)|소마 요시타네]]는 중립을 고수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연관도 있었고, 서군(西軍)인 [[:분류:사타케 가문|사타케 가문]]과도 인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소마 가문을 서군으로 간주하고 [[1602년]], 사타케 가문과 함께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구보타 번 (데와노쿠니데와 국)|구보타 번]]으로 옮겨간 [[사타케 요시노부 (에도)|사타케 요시노부]]는 소마 가문에게 아키타의 1만 석 영지를 제공하며 옮겨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요시타네의 아들 [[소마 도시타네]]는 '지금, 집안을 보전하고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자고 사타케의 밑으로 들어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라며 [[에도]]로 직접 찾아가 영지 몰수의 철회를 호소했다. 여기에 도쿠가와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의 설득이 힘을 실어주면서, 결국 요시타네는 책임을 지고 은거하며, 본래 영지는 도시타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리하여 소마 가문은 가까스로 그 본거지를 지켜내게 되었으니 소마 나카무라 번이 이로써 성립되었다.
 
초대 번주 도시타네와 2대 번주 [[소마 요시타네 (1619년)|요시타네]] 대에는 나카무라 성의 축성, 가신들의 재배치, 토지 조사 등이 이루어져 번의 체제를 갖추어나갔다. 또 이때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소마 말 쫓아 축제]]({{lang|ja|相馬野馬追|소마 노마오이}}) 행사에 무예의 색채를 더하여 오늘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덴메이 대기근]] 때 번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금지되어 있던 이민으로 [[호쿠리쿠 지방]]으로부터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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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소마 가문]]
*[[소마 시]]
*[[센다이 번]] : 1개 북쪽 옆
*[[이와키 다이라 번]] : 1개 남쪽 옆
*[[미토 번]] : 2 남쪽 옆
*[[니노미야 손토쿠]]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분류:일본의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