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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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프리드리히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의 딸 유디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슈바벤 공작이 된 뒤, 1152년 3월 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숙부인 [[독일의 군주|독일왕]] [[콘라트 3세]]의 지명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다. 즉위한 후 그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독일]] 제후들에게 특권을 주었으며 숙적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3세 사자공|하인리히 공작]]과 화해하는 데 성공했다. 1154년에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행사하여, 다음날인 1155년 6월 18일에 [[교황 하드리아노 4세]]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아 대관식을 올린다.
 
그러나 이후부터 프리드리히의 대(對)이탈리아 정책을 둘러싸고 교황과 대립하게 되었으며, 프리드리히는 1158년부터 5회에 걸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본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1162년에 그는 자신을 적대시 했던 [[밀라노]]를 포위 공격해 정복하였으며, 이로 인해 1165년에 교황으로부터 파문된다. 1168년 프리드리히 1세의 대이탈리아 정책에 대한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롬바르드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프리드리히는 1174년에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실행에 옮기지만, 국내에서 원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던 데다가 대부분의 병사들이 원정 중에 [[말라리아]]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레냐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동맹군에게 패배했다. 결국 1176년에 아나니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이탈리아 정책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그 다음 프리드리히는 국내 정책에 힘을 쏟아, [[폴란드]]의 속국화나 오스트리아의[[오스트리아]]의 공국화, [[보헤미아 왕국]] 설립, 숙적 하인리히 추방 등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또 [[시칠리아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어 남이탈리아에 군대를 보내지 않고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훗날 그의 아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 때 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할 수 있게 된다.
 
1189년,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예루살렘]]을 해방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제3차 십자군]]의 총사령관으로 출정하였다. 다음해에 이코니움 전투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190년 6월, [[소아시아]] 남동부 킬리키아의 살레프 강에서 목욕하던 도중에 어이없게도 물에 빠져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