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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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동위의 하남장관 후경이 귀순을 요청했다. 조정대신 사이에선 반대의견이 많았으나, 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출병했다. 하지만 동위에게 패배하여 하남은 동위에게 돌아갔다. 패배한 무제는 생각을 고치고 동위와 화해에 나서게 되자, 목숨이 위태롭게된 후경은 [[548년]]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하고, 무제를 붙잡아 굶겨 죽였다. 이것이 바로 후경의 난이었다.
 
무제 사후 3남 소강(蕭綱; [[소강 (양)|간문제]])이 뒤를 이었으나, 후경은 [[551년]] 황족 소동(蕭棟)을 옹립했고, 곧이어 그를 폐위하고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이라 불렀다. 이 반란 속에 각지의 여러 왕이 자립해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그중 형주에 있던 무제의 8남 소택(蕭澤; [[양 원제|원제]])는 부하 [[왕승변]](王僧弁)을 파견해 후경을 죽이고 강릉에서 즉위했다. 이윽고 촉에서 황제를 칭하고, 강릉으로 진군하던 동생 소기(蕭紀)를 [[552년]]에 격파했다.
 
그러나 [[554년]] 옹주자사 소찬(蕭餐)이 끌어들인 서위의 대군 앞에 소택은 패배해 죽고, 소찬은 강릉에 들어가 황제가 되었다. 이 소찬의 정권을 [[후량 (남조)|후량]](後梁)이라 부르지만, 실제 서위의 괴뢰정권에 불과했다. 또한 이때 촉도 서위에게 점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