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클리오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JackieBot (토론 | 기여)
잔글 r2.7.2) (로봇이 더함: arz:هرقل
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목록=[[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동로마 황제]]
}}
'''헤라클리우스''' 또는 '''헤라클레이오스'''({{llang|la|Flavius Heraclius Augustus}}, {{llang|el|Ηράκλειος}}, [[575년]] - [[641년]] [[2월 11일]])는 [[610년]] 악정을 펼치던 전임 황제 [[포카스]]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남쪽의 [[이슬람]]이 발흥하여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를 잃었지만 [[군관구제]]와 [[둔전병제]]를 최초로 실시하여, 무너져가는 [[동로마 제국]]의 행정과군대와 군대를 다시행정을 개편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등 제국을 [[7세기]]의 요구에민심에 맞게 변화시켰다. 열강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상태였던 동로마 제국이 그가 창안하고 정착한 군사·행정조직 덕분으로 이후 800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 생애 ==
=== 황제 등극 ===
헤라클리우스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집안 출신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같은 이름을 가진 헤라클리우스였는데 그는 동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사산 왕조 이란 제국|사산조 페르시아]]과의와의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고 [[카르타고]]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전임 황제 포카스의 학정에 못이긴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폴리스]]의 시민들이 아버지 헤라클리우스 총독에게 포카스 황제의 공포정치와 무능력으로부터 제국을 구해달라고 호소하자 그는 원정군을 준비하고, 아들 헤라클리우스에게 원정군의 지휘를 맡겼다. 2년 동안 젊은 헤라클리우스는 [[시칠리아]], [[테살로니키]] 등 제국의 곳곳을 다니며 반란 세력을 규합했고 드디어 [[610년]] 10월 콘스탄티누폴리스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포카스를 폐위한 후 36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 무너지는 제국 ===
그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당시 제국의 상황은 최악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각각 [[트라키아]]와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있었고 이란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맞은편인 [[칼케돈]]까지 진출하였다. 비록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난공불락의 요소였기에 안전했지만 제국의 변방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호스로우 2세]]의 사산사산조 왕조 이란 제국은페르시아는 [[611년]] [[안티오키아]]를 점령했고 [[613년]] [[다마스쿠스]], [[614년]] [[예루살렘]], [[616년]]에는 [[이집트]]를 손에 넣었다. 특히 예루살렘의 함락은 페르시아에 협력한 유대인에 의해 대대적인 [[그리스도인]]의 학살과 약탈약탈이 벌어졌고, 이때 [[그리스도]]의 [[성십자가]]를 빼앗겼다는페르시아에 사실로빼앗김으로 인해 제국의 신민들에게제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618년]] 헤라클리우스는 제국의 수도를 [[카르타고]]로 옮기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여 제국을 쇄신하려고 하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누폴리스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