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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발루아 왕가]]와 다툰 [[100년 전쟁]]과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툰 [[장미 전쟁]]으로 점철된 다사다난한 시기이기도 했다. 몇몇 왕들은 그 자신들이 전사로 유명했는데,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헨리 5세]]와 [[제3차 십자군]]에서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영국 전래 문학에서 기사도의 상징이 된 [[리처드 1세]]가 대표적이다.
 
[[헨리 2세]]는 앙주, 아키텐 등을 포함한 대영토를 지배하며 국내에서는 일련의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봉건 왕정을 확립하였으나, 그 후 왕의 전제 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막내 아들인 [[존 (잉글랜드)|존 왕]]은 실정을 거듭하여 대륙의 영토를 잃었고, 귀족의 반항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고 타협하였다. [[헨리 3세]] 때 왕의 전제에 반항하는 귀족 연합은 신흥 [[상인]]·[[기사 (군사)|기사]]들을 의회에 소집하여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에드워드 1세]]는 귀족과 협조하여 일련의 제정법에 의해 봉건사회를 정비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백년 전쟁]] 이후에 왕권이 실추된 반면 시민·상인층이 점차 성장하여 봉건사회를 변동시키게 된다. 특히 [[1381년]]의 농민 반란이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