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삼국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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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년]] 제갈량이 죽고 [[양의]](楊儀)가 군을 인솔해 퇴각하나 양의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魏延)이 명을 위반하고 난을 일으킨다. 왕평이 나서서 위연과 병사들에게 {{인용문2|[[승상]](제갈량)께서 막 돌아가셨는데 승상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너희들이 어찌 이런 더러운 일에 몸을 담았는가!}}라고 외치자 그의 병사들이 두려움을 떨어 뿔뿔이 흩어져 위연의 난은 쉽게 진압당하게 된다. 제갈량 사후 후전군(後典軍), 안한장군(安漢將軍)에 봉해져 [[오의]](吳懿)의 부장이 되어 한중을 지키고, [[237년]] 안한후(安漢侯)가 되어 오의 사후 한중을 지켰고 [[243년]]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에 임명된다.
[[244년]] 위의 대장군 조상(曹爽)이 10여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침공해오자
왕평전에 의하면 「오랫동안 전쟁에 있었기 때문에 문장이 쓰지 못하고, 알고 있는 글자는 10자에 못 미쳤지만, 구술 필기시킨 문장은 조리가 있었다고 한다.「사기」·「한서」를 다른 사람에게 읽게 해 그 내용을 논하고 요지를 파악했다. 법률을 충실히 이행하고, 농담하지 않고, 종일 단좌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무장으로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략) 왕평은 충용하고 엄정한 인물이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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