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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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활동 ==
보우는 [[대각국사 의천]]]이 치선이라고 갈파한 [[구산]]을 통합하고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지양하고자 [[원융부]](圓融府)를 건립하고 선사(禪師)의 품법으로 모든 불교를 총섭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ref name="글로벌-보우2"/>
 
보우는 일찍이 [[만법귀일]](萬法歸一){{.cw}}[[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친 바가 있었지만, 충목왕 2년에 [[중국의 불교|중국]]에 다시 건너가, [[임제]](臨濟)의 제17대 법손(法孫) [[석옥]](石屋)에게서 법을 받고 충목왕 4년에 귀국했다.<ref name="글로벌-보우3"/>
 
그러나 그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시 (경기도)|광주]])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다.<ref name="글로벌-보우3"/> [[공민왕]]이 보우(普愚)를보우를 불러 법을 물었을 때 보우는 왕도는 불교 신앙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하였다(《[[고려사]]》권 38).<ref name="글로벌-보우3"/>
 
그리고 [[선종 구산]]을 통합하여 [[임제종]](臨濟宗)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개경]]은 왕기가 다했으니 복고 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자고 아뢰었다《[[유창선도증국사행장]](維昌撰圖證國師行狀)》(공민왕 5년).<ref name="글로벌-보우3"/> [[공민왕]]은 보우의 건의를 수용해 곧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 통합에 착수하였고 [[한양]]에 궁절을 짓게 하였다.<ref name="글로벌-보우3"/> 그러나 [[한양]] [[천도]]는 일부 신하가 [[묘청]]의 예를 들어 반대하므로 좌절되고 이와 함께 [[원융부]](圓融府)<ref>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 서기 1356년에 왕사로 책봉된 보우가 국왕에게 허락받아 광명사(廣明寺)에 설치한 관청. 당시 불교는 사상에 관계되어 분열하고 대립하였는데 보우는 임제선(臨濟禪)에 의거해 구산 선종을 통일하여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원융부(圓融府)는 이런 보우의 의지가 수용되어 설치되었다.</ref>도 불과 10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ref name="글로벌-보우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