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출생, 사망 시점 및 장소 수정 / 인용문2 틀 수정 / 바깥고리 수정 |
출생, 사망 시점 및 장소 수정 / 인용문2 틀 수정 / 바깥고리 수정 |
||
1번째 줄:
{{작가 정보
| 이름 = 노천명
| 출생일 = [[1912년]] [[9월 2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황해도]] [[장연군]]
| 사망일 = [[1957년]] [[12월 10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직업 = 시인, 작가, 소설가, 언론인, 대학 교수
| 국적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br /> {{국기나라|대한민국}}
| 장르 = 시, 소설, 칼럼
}}
'''노천명'''(盧天命, [[
해방 직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했고, 1951년부터는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직원으로도 근무했다. [[황해도]] [[장연군|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15번째 줄:
== 생애 ==
=== 생애 초반 ===
노천명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38년]]에 퇴사했다. [[1938년]] [[조선일보]]사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그 뒤 4년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으며, [[1943년]]에는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고,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32번째 줄:
=== 한국전쟁 전후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파]]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 (문학)|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1953년]] [[3월 30일]] 제3차 시집 《별을 처다보며》를 출간했다. 1951년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촉탁에 임명되었다.
=== 사후 ===
93번째 줄:
노천명은 [[국어]][[국문학]]자 [[이희승]]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 작품을 보내 작품평을 듣고, 작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인용문2
노천명이 스승으로 모신 국어학자 [[이희승]]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노천명과 [[이희승]]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세로쓰기에 한자가 많이 섞였다.<ref name="priss"/>
== 관련 항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