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사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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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을 [[일제 강점기]]의 이론이나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아 [[단군]]을 [[신화]]로 매도하고 [[동이]], [[배달겨레]], [[한민족]]의 [[역사]]를 축소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강단사학계는 재야사학이 《[[규원사화]]》나 [[20세기]]에 쓰여진 위서(僞書)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기존의 연구성과를 무시하고, 지명의 유사성과 같은 단편적인 일치를 확대 해석하고 논리를 비약하여 [[한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증거라고 내민다고 비판하고 있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계의 이런 비판에 대해, 강단사학이 [[낙랑군]]의 치소(治所)를 [[왕검성]]으로 비정하거나 [[한군현]]의 [[현도군]] 초기 치소 위치를 비정하는
재야사학자 [[이덕일]]은 [[한국]] 주류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이 [[일제]] [[식민사관]]과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라고 주장한다. 노론의 후예들이 [[일제]]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으며, [[광복]] 뒤에도 사학계 주류가 되어 명(明)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친일]], 친미(親美)로 이어져 왔다는 게 주장의 요지이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75033.html|제목=식민사학 ‘만리장성’ 요동 밖으로 물렀거라|언어=한국어|이름=한승동 기자|작성일자=2009-09-04|출판사=한겨레신문|확인일자=2012-01-0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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