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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군수기술도입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양무운동]]은 [[1874년]]~[[1875년]] 일어난 [[모란사 사건]], [[1884년]] [[청불전쟁]],[[1894년]]~[[1895년]] 사이 터진 [[청일전쟁]] 등의 연전연패로 청조가 추진했던 양무운동은 그 한계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양의 기술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2단계'의 근대화 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이를 변법운동이라 한다. 유럽의변법운동의 정치제도(의원제)구체적인 도입을내용으로는 내세운서양 변법론은정치를 이미따라 [[청불전쟁]]의국회를 패배만들고 후에헌법을 나타나고제정하는 있었다것, 과거제를 개혁하고 서양 학교를 설립하는 것 등이 있다. 양무운동이 한창 추진되고 있던 1880년대 후반부터 변법론이 대두된 것은 먼저 대외적인 위기상황에서 굴욕적인 타협으로 인하여 [[양무운동]]의 파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양무운동가의 관(官)이 주도하는 기업운영방식인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형식의 군수공장 경영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변법론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만든 것이다.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의 변법주장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888년]]의 제1차 상서(上書)에서였다. 이와 함께 당시의 청류파 고관이었던 [[장지동]] 등이 의원제와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치활동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캉유웨이]]는 전통적인 [[유교]]와 [[공자]]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가하면서 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캉유웨이]]가 주목한 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었으며,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한 것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캉유웨이]]는 정치제도를 개혁하여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청일전쟁]]의 패전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체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변법자강운동 개혁의 전단계로서, 급진적인 [[캉유웨이]]의 지지자인 [[양계초]],[[담사동]] 등에 의해 [[호남 성]]에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이 학회,학당,신문,잡지를 통해 [[캉유웨이]]의 변법개혁론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는 서양근대의 자유평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황종희]]가 주창했던 '군권'(君權) 견제론 내지는 [[맹자]]를 매개로 한 '군주정체하'(君主政體下)에서의 귀민(貴民) 정도의 온건한 것이었다.
 
===무술개혁의 백일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