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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는 상, 중, 하의 세 권으로 나뉘는데, 천황가의 계보와 신화·전설 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신들의 이야기, 중 · 하권은 각 대(代)의 계보와 천황 · 황자들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중권은 초대부터 15대 천황까지, 하권은 16대부터 33대 천황까지). 내용은 크게 「제기」(천황 기록) 부분과 「구사」(전승)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제기」는 초대 천황에서 제33대 스이코 천황까지의 이름, 황후 · 황자 · 황녀의 이름 및 그 자손의 씨족과 이밖에 황궁의 이름 · 치세 햇수 · 붕어한 해의 간지 · 수명 · 능묘의 소재지 및 그 치세의 주된 사건 등을 적었는데, 이것은 당시 야마토 조정의 가타리베({{ja-y|語部|かたりべ}}) 등이 암송했다가 천황의 모가리({{ja-y|殯|もがり}}) 즉 빈소에서의 제의 등에서 구술하던 관습을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구사」는 궁정 내의 이야기, 황실이나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집계한 것으로 「제기」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 「제기」나 「구사」는 6세기 전반 내지 중엽 무렵까지의 시기에 야마토 조정의 오키미(大王)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이나 호족이 창작한 구비전승으로서 '천황'(오키미)이라는 존재가 야마토(일본)을 지배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임신의 난]]을 넘기고 신성화된 왕권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천황의 지배하인 국가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일본 민족의 진정한 역사적 전승은 아니다. 한편, 널리 민중들에게도 수용하게 할 필요도 있었던 점에서, 민중을 의식한 상권 부분이 본래의 《고사기》가 아니냐고 보는 설도 있다.
 
오노 야스마로는 히다노 아레가 '송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자의 훈독과 음독 표기를 섞고 알기 어려운 말에는 주(註)를 달았다. 본문은 변체 한문을 주로 하고 일본의 고어나 고유 명사처럼 한문으로 대용하기 어려운 것은 한 자 한 음 표기로 하고 있으며, 가요는 모두 한 자 한 음 표기로 본문의 한 자 한 음 표기 부분을 포함해 고대 일본의 특수한 가나 사용법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또 한 자 한 음 표기 가운데는 일부 신(神)의 이름 등의 오른쪽에 상(上), 거(去)처럼, 중국의 문서에서 볼 수 있는 한어의 성조인 사성 중 상성이나 거성 같은 문자를 배치하고 있다.
 
《고사기》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면서도 많은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 상당수는 민요나 속요로서 이야기에 맞추어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명한 것은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之男命)가 구시나다 히메(櫛名田比売)와 결혼했을 때 지어 불렀다는, 일본 와카(和歌)의 시초로 여겨지는
 
* 八雲たつ 八雲八重垣 妻ごみに 八重垣作る その八重垣を<br>뭉게뭉게 피어오른 이즈모의 구름 여러 겹으로 담을 두르네. 사랑하는 아내를 머물게 하기 위해 여러 겹 울타리 만드네. 훌륭한 울타리여.
 
등이 있다.
 
사료상으로 서문에 기록된 성립 과정이나 당시 황실의 관여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거나(서문에서 밝힌 천황의 지시로 완성했다는 《고사기》 성립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전혀 없다) 혹은 실제 사실과 모순되는 점이 많다는 견해가 있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續日本紀)》 같은 다른 공식 사서의 기록에도 《고사기》의 언급이 없는 등, 《고사기》라는 사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물증도 없다는 점에서 《고사기》를 위서로 간주하는 설도 주창되고 있다(후술). 《고사기》의 가장 오래된 사본은 [[남북조 시대 (일본)|남북조 시대]]의 것으로 그 이전의 모습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른바 '개찬설'도 있으나, 여기에는 고고학적인 반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