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아들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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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1765년]] 2월 본국 의회에서 열린 〈[[인지세법]]〉에 관한 논의 속에서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말이 사용 된 것이 그말의 유래가 되었다.<ref name="GregoryFremontBarnes">Fremont-Barnes, ''Encyclopedia'', 1:688.</ref> ‘인지세법’을 추진한 [[찰스 타운센드]]는 “이 아이들은 우리 덕분에 정착하고, 우리의 관용으로 발전했으며, ...... 그리고 우리의 무력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식민지 성향의 의원 아이작 발리는 “제국 군 덕분에 정착했다고? 말도 안돼! 여러분의 압정이 그들을 미국에 정착케한 것이다”고 반격하였으며, 그 연설에서 “이 같은 수 차례 조치 때문에 반발심으로 그들 자유의 아들들은 자신의 피를 흘려왔다”고 지적하며<ref>Middlekauff, ''Glorious Cause'', p. 79.</ref>, 신법(인지세법)에 저항을 예언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인지세법 반대파를 가리켜 ‘자유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국 당국과 충성파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이고, ‘폭력의 아들들’, ‘나쁜 아들들’ 등으로 불렀다.<ref>Hibbert, ''Redcoats and Rebels'', p 9.</ref> 일부 소설에서 자유의 아들들이 마치 지하 조직인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있으며, 이것이 자유의 아들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였지만, 실제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이 아니라, 급진적인 식민지인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통칭이었다. 북미 식민지의 애국파는 이 말에 의해 정체성을 공유했고, 지도자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유의 나무’와 같이 다른 곳에서 익명의 소집을 하여 종종 과격한 행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과격파 조직으로 자유의 아들들의 실체였다.
 
==주석==
{{주석}}
 
영국 당국과 충성파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이고, ‘폭력의 아들들’, ‘나쁜 아들들’ 등으로 불렀다. 일부 소설에서 자유의 아들들이 마치 지하 조직인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있으며, 이것이 자유의 아들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였지만, 실제로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이 아니라, 급진적인 식민지인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통칭이었다. 북미 식민지의 애국파는 이 말에 의해 정체성을 공유했고, 지도자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유의 나무’와 같이 다른 곳에서 익명의 소집을 하여 종종 과격한 행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과격파 조직으로 자유의 아들들의 실체였다.
 
{{토막글|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