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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브래독은 몇 번이나 병력을 고무시키며 분전했지만, 결국 오른팔과 폐를 맞아 쓰러졌다. 격렬한 저항도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워싱턴은 지휘를 맡는​​ 입장에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휘를 맡아 철수하는 군을 정비하여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그는 ‘머논가힐라의 영웅’이라는 별명이 붙여 후세에 이어지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해질 때까지 남아있던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는 자신들이 만들면서 온 길을 통해 퇴각했다. 브래독은 워싱턴과 다른 장교(로버트 옴 대위 또는 로버트 스튜어트 중령)에 전장에서 수습되어 탈출했지만, 전투 4일 후 [[7월 13일]]에 죽었다. 브래독의 시신은 그레이트 메도우즈 서쪽, 네세시티 요새에 묻혔다. 브래독이 묻힌 장소는 길 한가운데이며, 사체가 발견되어 모욕당하지 않도록 그 위에 짐마차가 엎었다. 목사도 중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워싱턴이 매장식을 담당했다.
 
브래독 원정대의 전투에 참여한 1,460여명 중 456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는 421명​​에 이르렀다. 장교들이 집중적으로 공격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큰 86명의 장교 중 63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영국군은 몸종과 요리를 담당할 50명 정도의 여성도 수행했지만, 살아남은 것은 4명에 불과했다. 250명의 프랑스 캐나다병은 8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으며, 인디언 전사는 637명 중 1​​5명이 전사하고, 12명이 부상당했다.
 
짐수레 부대를 지휘했던 던바 대령은 잔존 부대가 돌아오자 지휘를 맡았다. 던바는 철수 전에 물자나 대포를 파괴하라고 명령하고, 그래서 약 150량의 수레를 불태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도 영국군 세력은 적들보다 숫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기는 떨어졌고, 조직은 흐트러졌기 때문에 더 이상 임무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여파==
머논가힐라 전투에서 브래독의 패배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큰 사건이었다. 프랑스군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들은 [[오하이오 영토]] 지배권 쟁탈에서 우세하졌고, 잔인한 변방 전쟁이 더욱 치열해 졌다. 중립을 지키던 이 지역의 인디언들은 더 이상 중립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의 변경에 살던 식민지 개척민들은 군대의 보호를 상실한 상태가 되자 급히 수비대를 조직하였다. 이 변경의 투쟁은 [[1758년]] 포브스 원정대의 성공의 결과로 프랑스군이 듀케인 요새를 포기할 때까지 계속됐다.
 
[[1804년]], 브래독의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그레이트 메도우즈 서쪽 약 1.5 마일(2.4km) 도로에서 도로 공사 작업 중에 의해 발견됐다. 유골은 검사 후 재매장되었다. [[1913년]]에 대리석 비가 새 묘지에 세워졌다. 브래독이 빈사의 중상을 입은 전장은 현재 브래독 마을이 되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