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d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인터위키 링크 45 개가 위키데이터d:q173995 항목으로 옮겨짐
Chobot (토론 | 기여)
잔글 봇:인터위키 링크 1 개가 위키데이터Q173995 항목으로 옮겨짐. 이동 완료.; 예쁘게 바꿈
21번째 줄:
그는 전임자의 정책을 지속시키려고 하였으나 성격이 유화적이고 이미 나이가 많아 강경책을 쓸 수가 없어 여러 가지 일들로 곤란을 겪었다. 로마 교회의 도서관장이자 문서 관리인이며 비서였던 아나스타시우스에 의해 [[교회]]의 일이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힘 있는 가문 출신이었으나 교황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는 사제가 되기 전에 결혼을 하여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가 그 딸과 어머니를 죽이자 하드리아노 2세는 그에게 가장 엄한 벌을 내렸으나 얼마 후 그는 복직되어 다시 권세를 누리게 되어 논란이 많았다.
 
프랑크 왕국과의 문제는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가 정실부인 토이트베르가와 헤어지고 애첩 발트라다와 행한 결혼에서 기인되었다. 하드리아노 2세의 노력은 아무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문제는 로타르 2세가 죽음으로써 깊어졌는데 [[로타링기아 왕국]]에 내분이 일어나자 하드리아노 2세는 [[랭스]]의 힝크마르의 조언을 받던 [[카를 2세 (서프랑크)|샤를 ''대머리왕'']]을 물리치고 루트비히 2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위 [[독일]]의 [[프린스|왕자]]들, 샤를과 [[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독일왕 루트비히]]가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을 때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황제 루트비히 2세]]는 제외되었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드리아노 2세는 부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869년]] 6월 로마에서 개최된 지방 [[공의회]]는 [[포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교황은 사절 3명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로마 교회의 뜻을 전했으나 [[발칸 반도]]에서의 로마 교회의 사목권 주장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강요에 의해 퇴위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는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36번째 줄:
[[분류:872년 죽음|하드리아노 02세]]
[[분류:이탈리아 출신 교황|하드리아노 02세]]
 
[[tl:Papa Adriano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