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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을 때까지 ===
==== 공산주의 경도 ====
빈에 체재하는 도중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1922년)|그리스 터키 간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전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 성향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동경으로 러시아 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1925년, 1928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했으나 [[루사코프 사건]]이 발생한 이후 소비에트 체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변했다.
====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 ====
1926년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이혼했으며 이후 프랑스어와 그리스어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일시적으로 민족주의 쪽으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1944년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때 12월 사태로 알려진 내전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 문학세계 ===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탐구,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대다수의 작품에서 줄거리 전개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강조했으며, [[1951년]]과 [[1956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어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대표작으로는 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최후의 유혹》과 《그리스인 조르바》,《[[오디세이아(1938년)|오디세이아]]》(시)가 있다. 이중 소설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으로부터 신성모독을 이유로 [[파문]]당할 만큼 당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교회]]로부터 [[반 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았어도,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극작으로 1946년에 <카포디스토리아스>, 1959년에는 <배교자(背敎者) 율리우스>, 1962년에는 <메리사>가 각기 상연되었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 (1940년)
* 《크노소스 궁전》 (1940년)
* 《[[그리스인 조르바]]》(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1943년)
* 《수난》
* 《[[미할리스 대장]]》(Ο καπετάν Μιχάλης)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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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Nikos Kazandza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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