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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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증국번]],[[이홍장]] 등 한인(漢人) 출신 관료들이 근대적인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한편, [[장지동]],[[성선회]] 등은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자강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했을 뿐, 사회,[[정치]] 체제의 근대화는 무시한 결과, 때마침 일어난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어 그 약체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구체제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운동'의 지도자에게 물려주었다.
 
== 양무운동과 양무파 관료의 성격 ==
청조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양의 군사적 위력을 알게되었고, 더욱이 내부에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안팎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부국'과 '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의 근대 산업을 일으켜 난국을 타개하려는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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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의 대표자 [[이홍장]]은 [[증국번]]의 막우(幕友)로 발탁된 후 회군을 조직하고 [[상하이]] 지방의 경제력을 배경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는 [[증국번]]의 뒤를이어 [[1870년]] 직예총독에 임명되어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사임할때까지 직예총독과 북양통산대신에 재직하면서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청나라]] 말기 외교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큰 활동을 하기도 했다.
 
== 양무운동의 내용 ==
[[파일:Nanjing Jinling Arsenal 1865 built by Li Hongzhang.jpg|섬네일|330px|right|난징 기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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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초기에는 거액의 국가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매판자본가, 대상(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官物),관용(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뒷날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양무운동의 한계성을 드러내게 된다.
 
== 양무운동의 역사적 성격 ==
양무운동을 추진한 세력들은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인식하고 기존의 중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체서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양무운동의 추진 주체는 [[봉건제|봉건]]관료 또는 매판관료세력이지만 그들은 [[청조]]의 전통적 관료와는 달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지방관료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무너져가는 [[청조]]의 통치조직을 재건하여 봉건왕조의 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주된 개혁목표를 두었고 이것은 양무운동의 최대 한계점으로 작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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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3&Total_ID=3869003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 (19) 자강운동]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3&Total_ID=3879915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 (20) 일본의 개혁·중국의 개혁]
 
== 참고서적 ==
* 《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 《동양사개론》,삼영사
 
== 함께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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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중국}}
{{토막글|역사}}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분류:청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