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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7월에 브랜트는 뉴욕의 [[스태튼아일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뉴욕의 탈환을 계획하고 있던 [[윌리엄 하우]]의 군대에 들어갔다. 그 해 여름에서 가을까지 브랜트의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브랜트가 [[헨리 클린턴]], [[찰스 콘월리스]], [[휴 퍼시]]와 함께 1776년 8월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자메이카 경로에서 측면 공격에 가담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때 브랜트는 퍼시 공(이후 노섬벌랜드 공작이 되는)과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백인과 맺은 유일한 지교였다.
 
11월에 브랜트는 뉴욕을 떠나 패이트리엇들이 장악한 영토를 관통해 북서로 여행했다. 변장을 하고서, 밤에 이동하고, 낮에는 잠을 자면서, 오노쿠아가에 도착하여 가족과 상봉을 했다. 12월말에 다시 나이아가라 요새로 갔다. 그는 동맹 부족의 마을을 돌며, 이뤄코이가 영국군 동맹에 들어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많은 이로쿼이 부족들민이 브랜트의 계획을 묵살했다. 미국 개척민 반군을 지원했던 조제프 루이스 쿡은 브랜트와 평생의 적수가 되었다.
 
 
1775년 올버니에 열린 여섯 국가 전체 회의에서 그들이 중립정책을 고수하기로 결정을 했었다. 그들은 브랜트를 소수의 주전파 추장을 여겼고, 모호크 족을 비교적 약한 부족으로 여겼다.
 
좌절한 브랜트는 독립적인 전사단을 모집하기 위해 봄에 오노쿠아가로 돌아갔다. 일부 오노쿠아가 마을 사람들이 그와 합류를 했지만, 5월에는 반군에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왕당파를 모집하는데 성공했다. 이 무리는 브랜트 자원부대로 알려지게 된다. 6월에는 그들을 이끌고 우나딜라로 보급품을 얻기 위해 갔다. 그곳에서 브랜트는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트라이언 카운티 민병대와 마주치게 된다. 허키머는 이로쿼이 부족민들에게 중립을 고수하라고 요구했지만, 브랜트는 이들이 왕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인디언이라고 응답했다. 그들은 영토에서 유럽인들을 축출하고 싶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