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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역모죄로 처형당한 아버지 [[심온]]의 일에 연좌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ref name="kjs">김진섭, 《조선건국기 재상열전》 지성사, 1998, p.179, ISBN 8978890350</ref> [[조선 문종|문종]] 때에, 동생 [[심결]](沈決), 조카 심미(沈湄, 큰형 심준의 아들), 조카 [[강희안]] 등과 함께 관직에 등용되어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가 되었고,<ref>《문종실록》 1년(1451) 8월 6일 1번째 기사</ref> [[조선 단종|단종]] 때에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ref>《단종실록》 3년(1455) 4월 4일 1번째 기사</ref> [[조선 세조|세조]] 때에, [[공조판서]],<ref>《세조실록》 3년(1457) 7월 21일 1번째 기사</ref> [[판한성부사]],<ref>《세조실록》 4년(1458년) 6월 28일 1번째 기사</ref> 영중추원사를 거쳐,<ref>《세조실록》 7년(1461년) 4월 15일 3번째 기사</ref> [[1466년]]에는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으며,<ref>《세조실록》12년(1466) 10월 19일 3번째 기사</ref> [[1467년]]에는 [[의정부]] [[영의정]]에 올랐다.<ref>《세조실록》13년(1467) 5월 20일 2번째 기사</ref> 세조는 심회를 숙부라 부르고 이름은 부르지 않으며 특별히 총애하고 대접했다.<ref name="kjs"/> 명문가 출신으로 왕실은 물론 관료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심회는 정난을 통해 보위에 오른 세조에게 있어 새 왕실의 합리화에 절실히 필요한 존재였다.<ref name="kjs"/>
심회는 [[조선 예종|예종]] 즉위년인 [[1468년]], [[남이]]의 옥사에 공을 세워 익대공신 2등에 녹훈되고 청송군(靑松君)으로 봉해졌다.<ref>《예종실록》 즉위년(1468) 10월 28일 3번째 기사</ref><ref>《예종실록》 즉위년(1468) 10월 30일 8번째 기사</ref> [[조선 성종|성종]] 때에는 원상을 지내고,<ref>《성종실록》 1년(1470년) 2월 9일 3번째 기사</ref> 청송 부원군(靑松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ref>《성종실록》 1년(1470년) 8월 12일 5번째 기사</ref> 좌리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ref>《성종실록》 2년(1471년) 3월 27일 3번째 기사</ref> [[1476년]]에는 다시 좌의정이 되는 등 원로대신으로 권세를 누렸다.<ref>《성종실록》 7년(1476) 8월 11일 2번째 기사</ref> 심회는 [[1491년]] 궤장을 하사받고,<ref>《성종실록》 22년(1491) 6월 1일 4번째 기사</ref> [[1493년]]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 사건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뒤늦게 관직이 추탈되고 부관참시되었지만,<ref name="kjs"/>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