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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 10월 [[새러토가 전투]]에서 영국군 [[존 버고인]] 장군이 항복한 다음 프랑스가 미합중국의 동맹국으로서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하자 영국군의 대 미합중국 전략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부의 주에서는 경제와 군사의 거점지에 대한 기습 정도로 그들의 전략이 축소되었고, 조지 워싱턴 대륙군을 결전의 장소로 이끌어 낼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영국군이 본거지로 하는 [[뉴욕 시]] 주변의 방어가 강화된 진지에 군대를 배치하고, 그 이상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1779년]] 영국군이 구상한 작전에 내심 큰 기대를 하였지만, 결국은 북미총사령관인 [[헨리 클리턴클린턴]] 경의 인력이 부족하는 의견과 그 작전을 위해 약속된 병력의 도착 지연으로 방해를 받았다. 클린턴은 뉴저지 북부 미들브룩에 있던 대륙군 병영를 약화시켜서, 뉴욕 시를 침공하여 그곳을 손에 넣으려 했다. 이것이 성공하면 워싱턴의 보급선을 위협받게 될 것이며, 허드슨 강 고원 지대로부터 보다 교전에 적합한 땅으로 끌려나오게 될 것이라고 클린턴은 믿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