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침공 (1775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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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회의의 승인===
1774년에 모인 [[제1차 대륙회의]]는 [[10월 26일]] 자 공식 서한에서 1775년 5월에 개최되는 [[제2차 대륙회의]]에 프랑스계 캐나다인도 참가하도록, 즉 퀘벡 식민지도 혁명에 참가하도록 초청했다. 제2차 대륙회의도 1775년 5월에 같은 내용의 두 번째 편지를 보냈는데, 어느 편지에도 실질적인 반응은 없었다.
 
타이컨더로가 요새 탈취에 이어 아놀드와 앨런은 영국군이 미국 식민지를 분할하려는 시도에 맞서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방어 거점으로 삼을 필요성을 주장하고 더불어 퀘벡의 보호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들은 1,200 ~ 1,500명 정도의 소수의 군대로 퀘벡 식민지에서 영국군을 곤란하게 하는 충분한 능력을 보였으며, 퀘벡에 대한 별도의 전략을 각각 제시했다. 대륙 회의는 당초 타이컨더로가 등의 요새를 포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뉴욕과 코네티컷의 각 식민지는 기본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군대와 물자를 지원하도록 촉구했지만, 뉴잉글랜드와 뉴욕 식민지 일반 대중들은 대륙 회의에 그 입장을 바꾸도록 항의를 했다. 이 때 퀘벡 총독 [[가이 칼튼]]이 세인트존스 요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뉴욕 식민지 북부의 이로쿼이 족 인디언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이 밝혀져 대륙 회의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1775년]] [[6월 27일]], 대륙 회의는 [[필립 스카일러]] 장군에 그 지역을 조사하도록 인정하고, 타당성이 있다면 침략을 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지휘권을 받지 못했던 베네딕트 아놀드는 보스턴으로 가서 [[조지 워싱턴]] 장군을 설득하여 아놀드의 지휘로 별동대를 퀘벡으로 파견하게 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