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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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득'''(黃世得, [[1537년]] ~ [[1598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처종형(妻從兄)으로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부하인 장흥부사로서 당포해전과 부산포 해전때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본관]]은 [[성주 황씨|성주]](星州), [[자]]는 사구(士求),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한 뒤 사도 첨사로서 [[명량 해전]]에서 쇠사슬 조정관으로서 조선 수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고, 1598년 10월 순천 [[왜교성 전투]]에 참전하여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이 육해군 합동 작전을 어기고 공격을 하지 않자 명나라 수군이 조선 수군과의 연합 작전 없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자 이순신의 명으로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진인]](陳璘)을 구하기 위해 군관 이청일과 함께 군졸 100여명을 지휘해 [[진린|진인]]을 구출했지만구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구출대 전원과 장렬히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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