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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고종 20년) [[과거 시험|과거]]에 급제,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 망명 생활을 했다. 후에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년]] [[4월 7일]] [[대한제국|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후일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의 개화 계몽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고종|고종]]에 의해 강제 출국된 뒤 [[미국]]에 체류, [[대학]]을 다니며 [[의사]]로 활약했다. 이후 문구점과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합방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박용만 (1881년)|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재미[[한국인]] 교민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전후,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하면서 생계에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여 [[1945년]] [[1월]] 미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남조선 과도정부|과도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다가 [[1948년]] 출국 후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였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