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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삭발령'''은 [[대한제국]]에서 [[1902년]](광무 7년) [[8월]]부터 [[1910년]](융희 4년) [[10월]]까지 [[대한제국]]에 존재했던 법령의 하나였다. 제1차, 제2차 [[단발령]](1895, 1900)이 포고되었으나 사대부와 백성들이 단발을 하지 않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1902년]]부터 군수삭발령을 내려 군수, 참서관, 현령, 이속, 향리들에게 강제적으로 삭발을 감행하였다.
 
[[단발령]]의 최초 시행 과정에서 백성들의 반발을 감안, 관료들의 삭발은 자율에 맡겼으나 삭발하지 않는 관료들이 존재하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광무개혁]]을 단행하면서 군수삭발령을 추진하였다.
 
== 추진 배경 ==
[[1895년]](고종 33년32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단발을 하면 위생에도 편리하고, 머리 감기에도 좋다는 서양인 외교관과 일본인 외교관의 건의를 듣고 단발을 고심하였다. 그해 [[10월]]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권고로 단발을 감행하고, 태자 순종에게도 단발을 시켰으며, 내무대신 유길준을 시켜 정부 관리들의 단발을 감행하였다. [[11월 15일]] 내린 [[단발령]]을 [[고종]]이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은 후, [[유길준]]을 시켜 태자의 머리를 깎게 하고, [[경성부]]의 모든 관리와 지방의 관찰사 등도 머리를 깎아 이에 따랐다.
 
그러나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 거두들의 항의 시위와 상소가 빗발쳤다. [[최익현]] 등 유림 거두들 외에도, [[성리학]] 사상에 젖은 당시 백성들과 사대부들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을 이유로 항의하였고, [[을미사변]] 당시 정부의 미숙한 대응에 분개, 불만을 품은 지방의 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의병을 일으킨다.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단발령을 강제로 감행하여 도성에 있던 백성들의 머리를 모두 삭발한다. 그러나 반발이 거세지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1896년]] [[1월]] 단발령을 자율에 맡겼다.
 
[[1900년]](광무 3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다시 단발령을 강행한다. [[을미의병]]과 같은 조직적인 반발은 덜하였으나 지식인들과 관료들 일부는 단발을 회피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단발 문제를 꺼낸다. [[1902년]] [[8월]] 군부, 경무청에 소속된 군인, 경찰, 관원 등 제한된 범위의 인물들에게 한하여 그때까지도 단발하지 않은 관료, 군인, 경찰관들에 대해 재차 강제 단발을 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응하는 자는 파면과 해임 등의 처분을 내렸다. [[1902년]] [[10월]], [[단발령]]에 불응하던 [[이도재]] 등 정부 대신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명령이 하달되어 이에 불응하는 사람은 그 머리를 자르게 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어 군수, 참서관, 현령, 이속, 향리들에게 강제적으로 삭발을 감행하였다.
 
== 삭발령 강행 ==
그러나 지방에서는 단발령 최초 공포 후 10년, [[1900년]] 단발령이 다시 공포된 지 5년이 지난 [[1905년]] 무렵까지도 조선 13도의 백성은 물론 당시 [[제주도]] 군수이던 [[정교]](鄭喬) 등 많은 관리들이 머리를 깎지 않았다.
 
[[1906년]](광무 9년) [[내무부]] 대신 [[이지용]](李址鎔) 등은 아예 관리들의 머리를 삭발할 것을 상주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허락하였다. 동시에 삭발에 불응하는 자는 처형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고종의 재가 직후 내무대신 [[이지용]]은 각 [[도]]에 명령을 내려 [[군수]], [[참서관]], [[주사]](主事) 등 관리들에게 아예 [[불교]] [[승려]]처럼 삭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삭발령에 불응하는 자는 즉각 파면, 해임 및 투옥도 강행하라고 주문하였다. 그러나 [[1907년]] 곡산군수가 된 정교 등은 계속 회피하거나 숨으면서 끝내 삭발을 거부하였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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