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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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은 확실치 않으나, 미천한 신분이었다.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1894년]] 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해 [[동학란]]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하여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
 
을미사변 때 광화문 앞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죽었는데 다만 《고종실록》에서는 광화문 밖에서, 《[[한국통사]]》에서는 궁궐 안에서,<ref> 박은식, 《[[한국통사]]》(김승일 역, 범우사. 1997) 194쪽.“새벽녘에 서대문에 이르자 훈련대와 일본군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행군했고, 날이 샐 무렵 광화문에 도착하여...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소식을 득도 달려와 큰소리로 이들을 꾸짖다가 일본병에게 살해되었고, ... ”</ref>《대한계년사》에서는 궁궐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 《[[매천야록]]》에서는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ref name="명성황후"> {{서적 인용 |저자=한영우 |제목=명성황후와 대한제국|꺾쇠표=예|발행일자=2001-10-20 |판=초판 1쇄|출판사=효형출판 |출판위치=서울 |id=ISBN 89-86361-57-4|쪽=53~54쪽}}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