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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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이후 [[6월 6일]] 오전 10시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다. 6월 6일 점심때까지 독립군은 100m 안팎의 산악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 병력 60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근처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 9명이 유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소대장 이화일의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일본군]] 제19보병사단장은 [[일본군]] 19사단 소속 보병 소좌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인 [[월강추격대대]]를 출동시켰다. 독립군 밀정이 새다리에 편지를 묶어서 띄워 보낸 편지를 통해 1,2시간 만에 이 사실을 접한 [[홍범도]], [[최진동]] 등 독립군 지휘에서는 1개 대대급도 안되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이로운 꼭대기 고지에 올라가서 시야를 넓히는 것이 덜 불리하리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조를 나누어 일부는 산 꼭대기로 올려보내고, 일부는 안산(安山) 촌락 후방고지에 진지를 만드는 한편, 인근 지역에 목책과 허수아비들을 설치하였다.
 
== 임시정부의 발표 ==
임시정부 군무부는 이 삼둔자 전투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인용문2|[[1920년]] [[6월 4일]] 오전 5시에 아군 1개 소대는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서 출발하여 [[종성군]] 북방 약 5리 되는 종성군 강양동 상류로 도섭하여 해당지 왜적의 소초장 헌병 군조 후쿠에(福江三太郞)가 인솔한 적병(헌병 巡査兵丁) 약 1소대를 격파했고, 기후 해가 일 막 일모(日暮)하므로 강을 도로 건너 되돌아와 적정을 경계하던 중 왜적 남양수비대장 新美二郞 보병 중위는 화룡현 패전의 보고를 추궁하고 즉시 그 부하 1개 중대 병력과 헌병순사 10여 명을 인솔하고 복수전주의로 도강하여 아군을 향하고 전진할 새, 아군의 수색병은 이를 발견하고 즉시 본대에 경보하니 아군 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은 그 부하 1소대를 삼둔자 서남방 음폐지에 은폐케 한 후 약간의 병원(兵員)을 출하여 거짓 공격(佯擊) 하다가 거짓 은퇴하매 왜적은 추격행동을 취하여 은복(隱伏)한 아군의 부대 전방에 도착할 새(6일 오후 10시)에 급사격으로 적의 부대를 파멸하니, 그 잔병은 삼둔자 북방으로 패주하고 왜적의 제39사단장은 전쟁 패배의 급보를 접하고 야스카와(安川) 소좌에게 출동 명령을 하하다.<ref>윤병석, 《간도역사의 연구》(국학자료원, 2006) 76페이지</ref>|[[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방부|군무부]] 보고서}}
 
삼둔자 전투의 승리는 미약하였지만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이 삼둔자 전투에 대한 논평을 발표하고, 결과를 보고서로 남겼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보고서에는 양민 학살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