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아 리비에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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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775년]] 9월부터 캐나다를 침공한 대륙군은 [[1775년]] 새해 전야에 열린 [[퀘벡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이후 [[베네딕트 아놀드]]가 지휘하는 나머지 부대는 1776년 5월경 [[퀘벡 시]]를 포위했다.<ref name="Stanley37_104">[[#Stanley|Stanley]], pp. 37–104</ref> [[5월 6일]] 새벽, [[영국 해군]]의 함선이 퀘벡 항구에 들어갔다. 이 함선을 타고 온 부대는 즉시 시내에 진입했으며, 그때 [[가이 칼튼]]은 부대를 꾸려서 대륙군이 숙영하고 있는 곳으로 보냈다.<ref name="Stanley108">[[#Stanley|Stanley]], p. 108</ref> 이때 대륙군을 지휘하고 있던 [[존 토마스]]는 이미 퇴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이 도착하자 부대는 위기에 빠졌다. 대륙군은 무질서한 퇴각을 시작하여, [[5월 18일]] 경에 겨우 소렐에 도착했다.<ref name="Stanley126">[[#Stanley|Stanley]], p. 126</ref>
 
===영국군의 준비===
5월 중순과 6월 초에 군대와 군수품을 실은 선박이 연이어 퀘벡 시에 도착했다. [[6월 2일]] 경 제9, 제20, 제29, 제 53 및 제60 보병연대가 합류했고, 지휘관 [[존 버고인]] 장군도 도착했다. 이 부대와 함께 [[프리드리히 리더젤]] 남작이 지휘하는 [[브라운 슈바이크 공국]]에서 독일인 용병 부대도 도착했다.
 
칼튼은 5월 초순에 대륙군을 패퇴시킨 후, 특히 의미있는 공세는 취하지 않았고, [[5월 22일]]에 제47 및 제29 보병연대의 부대를 수송한 배를 앨런 맥린이 지휘하는 트루아 리비에르에 파견했다. [[6월 2일]]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이 추가 부대를 이끌고 트루아 리비에르에 도착했다. [[6월 7일]] 경 트루아 리비에르에 있던 지상 부대 1,000여명으로 구성된 추가 부대와 물자를 실은 25척의 함선이 트루아 리비에르에 가까운 강 또한 몇 마일 상류에 정박했다.
 
===미국군의 준비===
불과 몇 백명의 군인을 실은 3척의 영국 함선의 도착으로 토마스 부대가 철수한 이래, 토마스는 영국군의 정확한 세력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5월 21일]] 소렐에서 열린 전략 회의에는 [[제2차 대륙회의]]의 대표도 나와 있었지만, 트루아 리비에르와 퀘벡 시 사이에 데샹보에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영국군의 세력에 관한 막연한 보고였던, 소문에 근거하여 내린 것이며, 군인이 아닌 대륙회의의 대표가 결정을 주도했다. 토마스는 [[5월 21일]] [[천연두]]에 걸려, [[6월 2일]] 결국 사망했고, 군대의 지휘는 단기간 [[윌리엄 톰프슨]]에게 이행되었지만, [[6월 5일]]에 [[존 설리번]]이 타이컨더로가에서 원군을 데리고 도착하자 그로 교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