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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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역사는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여러 민족이 이 지역에 살았고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아마도 [[몬족]]이나 [[쀼족]]일 것이다. 9세기에 [[버마족]]이 중국-티베트 국경 지대로부터 [[이라와디 강]] 계곡으로 이주해왔고 현재 미얀마의 다수 민족을 이루고 있다.
 
미얀마의 역사는 현재의 미얀마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베트남]], [[라오스]], [[타이]]와 같은 이웃 국가와도 관련있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다.
 
=== 초기의 역사 ===
고고학적인 증거는 현재의 미얀마 지역에 꽤 오래 전부터 문명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발견은 샨 주의 빠다린 동굴의 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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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버마어족]]의 [[쀼족]]이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도래해 몇 개의 도시 왕국을 세웠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이라와디 계곡 중류의 삐였다. 몬족과 쀼족의 왕국들은 중국과 인도 사이의 육상 교역로 역할을 했다. 쀼족의 왕국들은 9세기 초에 강력한 [[남조 (왕국)|남조]] 왕국(현재의 [[윈난 성]])의 몇 차례의 침입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 버간 왕조 (1044-1287) ===
티베트버마어를 사용하는 [[버마족]]이 7세기부터 현재의 윈난 성의 남조 왕국으로부터 이라와디 계곡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849년에 버마족은 [[바간 (미얀마)|버간]]에 몇 개의 작은 왕국들을 세웠다. 그러나 [[아나우라타]] 왕(1044~1077)의 치세가 되서야 비로소 버간의 영향력은 현재의 미얀마 전체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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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간의 힘은 13세기에 점차 쇠약해졌다. [[몽골]]의 [[쿠빌라이칸]]은 1277년에 고지 버마를 침공하였고 1287년에 버간 시를 약탈하였다. 이로써 버간의 2세기에 걸친 이라와디 계곡 지배는 종식되었다.
 
=== 작은 왕국 (1287-1531) ===
몽골인들은 찌는 듯한 이라와디 계곡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었다. 그러나 [[샨족]]이 몽골족과 함께 윈난 성에서 이주해 와 이라와디 계곡, 샨 주, [[라오스]], [[타이|시암]], [[아삼]]으로 퍼져 나갔고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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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에 계속되는 전쟁으로 잉와는 점차 쇠퇴하였다. 주변 지역은 독립하거나 자치를 하게 되었다. 1486년 [[따웅우]]의 [[민찌뇨]] 왕(1486~1531)은 잉와로부터 독립해 작은 독립 왕국을 세웠다. 1527년에 샨족은 마침내 잉와를 점령하여 거의 2세기에 걸친 힘의 균형은 깨지게 되었다. 샨족의 고지 버마 지배는 1555년까지 계속되었다.
 
=== 따웅우 왕조 (1531-1752) ===
{{본문|따웅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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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족 왕 아나욱펫룬(1605~1628)은 전열을 가다듬어 1611년에 포르투갈인들을 격퇴하였다. 아나욱펫룬은 버마 북부, 남부, 샨의 소왕국들을 재규합하였다(라킨과 따닌타이는 제외). 따룬 왕(1629~1648)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한 후에 100년 동안 왕국은 천천히 쇠퇴하였다. 몬족은 1740년에 프랑스인들과 시암인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에 성공하여 1747년에 저지 버마에서 독립하였고 1752년에는 따웅우의 근거지인 잉와를 점령해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 꼰바웅 왕조 (1752-1885) ===
[[얼라웅퍼야]] 왕(1752~1760)은 1752년에 [[쉐보]]에 [[꼰바웅 왕조]]를 건국하였다. 그는 1755년에 [[양곤]]을 세웠다. 1760년에 죽을 때까지 얼라웅퍼야는 버마를 재통합하였다. 1767년에 신뷰신 왕(1763~1777)은 아유타야 왕국을 약탈하였다. 중국의 [[청나라]]는 1765년부터 1769년까지 4차례 침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중국인들의 침입은 1770년대 후반에 시암인들이 버마인들에 대항해 방콕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왕국을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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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돈]] 왕(1853~1878)은 1859년에 [[만달레이]]를 세워 수도로 삼았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얀마를 놓고 서로 경쟁하도록 조종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돈은 1875년에 [[카야]]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의 계승자인 [[티바우]] 왕(1878~1885)은 거의 무기력했다. 1885년에 영국은 프랑스가 [[라오스]]를 점령한 것에 놀라 [[고지 버마]]를 점령하였다.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제3차 영국-버마 전쟁]]은 수도 [[만달레이]]를 점령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단지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버마 왕실은 인도의 [[라트나기리]]로 추방되었다. 영국군은 버마의 심장부 뿐만 아니라 샨, 친, 카친 구릉 등의 미얀마 전체를 진압하는데 최소 4년이 걸렸다. 소규모의 저항은 1896년까지 계속되었다.
 
=== 식민지 시대 (1886-1948) ===
버마인의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해, 세계 대공황 이후 젊은 지식층의 사이에 퍼졌다. 1930년에는 타야와디 지방에서, 농민이 무장 봉기를 실시해, 저지 버마 전역에 퍼졌지만 1931년에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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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12일]], [[팡롱 조약]]에 따라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되다.
 
=== 민주 공화국 (1949-1962) ===
독립 후, 미얀마는 [[우 누뽕]](U Nu Ppong)의 신정권을 수립하였으나 크나큰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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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아웅 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공작원들이 한국 대통령및 각료들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장소였던 아웅 산의 묘소에 설치한 폭탄이 터져 [[한국인]]각료와 미얀마인 다수가 살상된 사건으로, 사건 당시에 한국(남한)측은 미얀마가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미얀마당국이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였으나, 사건을 조사한 미얀마정부가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고 국교를 단절함으로써 오해는 해소되었다. 아웅 산은 미얀마 독립의 영웅으로 대단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미얀마에서는 북한을 대대적으로 규탄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후일 네윈 장군은 한국(남한)에 답방하였다.
 
=== 이후 (1962-현재) ===
네윈은 1988년까지 군사 독재체제를 유지했지만, 경제정책의 실패로부터 심각한 인플레를 부르는 등 , 미얀마의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1988년에는 네윈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 네윈 장군은 7월에 BSPP 의장을 물러난다([[8888 항쟁]]). 같은 해 9월 18일에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총선거를 공약으로 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수백개의 정당이 결성되었다. 군부는 국민 통일당을 결성해 체제 유지를 도모했다. 민주화 지도자 [[아웅 산 수 치]] 등은 [[민족민주동맹]](NLD)을 결성했지만, 아웅 산 수 치는 선거 전의 1989년에 자택 연금 되었다. 이후, 그녀는 장기 연금과 해방을 반복해 겪었다. 1990년 5월의 총선거에서는 NLD와 민족 정당이 압승했지만, 군정은 선거 결과에 근거하는 의회 소집을 거부해, 민주화 세력의 탄압을 강화했다. 일부의 총선거 당선자는 국외로 피해 망명 정권으로서 [[버마 연방 국민연합정부]] (NCGUB)를 수립했다. 군사 정권은 1994년부터 2007년에 걸쳐 신헌법 제정을 향해서 기본 원칙을 심의하는 국민 회의를 단속적으로 개최해 왔다. 2008년 5월 10일 및 같은 달 24일에 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 가결된 일로, 정권이 주장하는 개혁개방의 로드맵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