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 쇼나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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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덴엔]](天延) 2년([[974년]]), 아버지 모토스케의 스오노카미(周防守) 부임에 즈음해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였고 4년을 「비(鄙)」에서 보냈다. 덧붙여 그녀가 수필 《마쿠라노소시》에서 묘사한 항해 여정의 모습은 단순히 상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박진감이 넘치는 것으로, 혹은 저자가 물길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갔다고 보기도 한다. 그 사이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쿄(京)에 대한 상상은 훗날 쇼나곤 자신의 '궁정(宮廷)'이라는 공간에 대한 동경으로 연결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981년]] 다치바나노 노리미쓰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으나 이후 이혼했다.<ref name="makura"/> [[993년]]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딸 [[후지와라노 데이시]]가 입궁해 [[이치조 천황]]의 중궁이 된 뒤 출사해 그녀를 보필했다. 데이시가 사망한 이듬해인 [[1001년]], 대표작 《[[마쿠라노소시]]》의 초고를 완성했다. 후지와라노 무네요와 결혼했으며 만년에는 비구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name="makura"/>
[[덴겐]](天元) 4년([[981년]]) 무렵 무쓰노카미(陸奥守)였던 다치바나노 노리미쓰(橘則光, [[965년]] - [[1028년]] 이후)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노리나가(則長, [[982년]] - [[1034년]])를 얻었지만, 무골(武骨)이었던 남편과의 반목으로 곧 이혼하고 말았다.<ref name="makura"/> 하지만 전 남편과의 교류는 이후로도 유지되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조토쿠(長徳) 4년([[998년]])까지 교류가 있었으며 그의 여동생인 세우토(背)와의 사이도 궁중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뒤에 셋쓰노카미(摂津守) ・ 후지와라노 무네요(藤原棟世)와 재혼하여 딸 고바노 묘부(小馬命婦)를 얻었다.
 
[[이치죠 천황]](一条天皇)의 치세인 쇼랴쿠(正暦) 4년([[993년]]) 겨울 무렵부터,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딸로 입궁하여 중궁(中宮)이 된 [[후지와라노 데이시|데이시]](定子)의 개인 뇨보의 자격으로 출사하여 그녀를 보필했다. 학문에 뛰어나고 재기발랄했던 그녀는 주군 데이시의 총애를 받게 되기 전에도 이미 조정의 여러 구교나 덴조비토(殿上人)들과의 증답이나 기지를 건 응수를 자주 주고 받으며 당시의 궁정 사회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녀와 친교를 주고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후지와라노 사네카타(藤原実方, ? - [[998년]]), 후지와라노 다다노부(藤原斉信, [[967년]] - [[1035년]]), 후지와라노 유키나리(藤原行成, [[972년]] - [[1027년]]), 미나모토노 노부카타(源宣方, ? - 998년), 미나모토노 쓰네후사(源経房, [[969년]] - [[1023년]]) 등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특히 사네카타와의 증답이 많이 알려져 있어 연애 관계가 아니었나 추정하기도 한다).
 
세이 쇼나곤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널리 알리게 된 데에는 그녀가 남긴 수필 《마쿠라노소시》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쿠라노소시》에는 '모노하즈쿠시(ものはづくし)' 즉 시의 소재가 된 명소 등의 유취를 비롯해, 시에서 뛰어난 문구, 일상의 관찰, 개인 및 주변 사람들의 소문, 기록으로서의 성질을 가진 그녀 자신의 회상 등, 세이 쇼나곤이 10세기 헤이안 시대의 궁정에서 보낸 동안에 흥미를 가지고 기록했던 모든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마쿠라노소시》는 [[조호 (999년)|조호]](長保) 2년([[1000년]])에 중궁 데이시가 사망한 이듬해에 그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데이시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 쇼나곤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의 그녀의 인생은 자세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세이 쇼나곤 자신의 개인 문집과 같은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재혼한 남편인 후지오라노 무네요와 함께 남편의 부임지 셋쓰로 낙향했다고 생각된다(《세이 쇼나곤 집》의 이본에는 다이리의 사자로서 구란도蔵人 노부카타信隆가 셋쓰로 왔었다는 기술이 있다). 만년에는 비구니로서 출가하였으며<ref name="makura"/> 죽은 아버지 모토스케의 산장(山莊)이 있던 히가시야마 게쓰륜(東山月輪) 근처에서 살며 후지와라노 기미토(藤原公任) 등 당시 궁정의 옛 관인이나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 [[아카조메에몬]](赤染衛門) 등 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쇼시]](彰子)를 섬기던 뇨보들과도 소식을 주고받았음을 해당 인물들의 문집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망년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현재 일본 각지에는 세이 쇼나곤의 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남아 전하고 있다.
 
중고(中古) 36가선(歌仙) · 뇨보 36가선의 한 명으로 꼽히며, 42수의 소규모 가집(歌集) 《세이 쇼나곤 집(清少納言集)》이 전한다. 《고슈이와카슈(後拾遺和歌集)》 이후 황명으로 편찬된 와카집(和歌集)에 15수의 와카가 수록되었으며, 한학(漢学)에도 능통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