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연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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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에서 1880년대 중순까지, 독일의 초창기 축구는 [[럭비]]의 규정과 비슷하였다. 그 이후, [[1890년]]에 들어서 현대 축구가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몇몇 클럽이 세워졌으며, 이 클럽들이 지역과 국가 레벨에 맞게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DFB (Deutscher Fußball-Bund) 가 [[1990년]]에 86개의 클럽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라이프치히]]에서 설립되었다. DFB는 지역 대회만 있던 것을, 1902-03 시즌을 시점으로 단일 국가 챔피언쉽이 활성화되도록 하였다. [[1904년]]에 [[FIFA]]가 파리에서 설립되었을때, 독일은 그 창단에 참가하였던 7개국 중 하나가 아니었으나 [[9월 1일]] FIFA가 실권을 얻자, 독일은 8번째 회원국으로 가맹하였다. [[1908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공식 첫경기를 치루었다.
 
[[1914년]] 이전까지 [[독일 제국]]은 현재의 독일보다 영토가 훨씬 컸었다. [[알자스로렌|알자스로렌 지방]]이 서쪽 끝에, 폴란드 일부가 동쪽 끝이었다. 지역 협회의 경계는 주요 철도 간선에 따라 나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보헤미아]]도 독일 제국에 3면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 지역 또한 참여 가능하였다. 그에 따라 [[프라하]]는 독일 챔피언쉽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수 [[덴마크]]계의 [[쇠네르윌란 주|북부 슐레스비히]]는 DFB 참여를 거부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지역은 [[덴마크]]령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국경 변경은, DFB로 하여금 변화에 적응하도록 하였다. [[자를란트 주|자를란트]], [[단치히 자유시|단치히]], [[메멜란트]]는 [[독일]] 본토와 떨어졌다.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은 [[폴란드]] 본토의 일부인 [[폴란드 회랑]]으로 분리되었다.
 
DFB의 [[나치 독일]] 시기 [[펠릭스 린네만]]과 그 대표의 기능은 "100년 DFB"(100 Jahre DFB)와 [[닐스 하베만]]의 "푸스볼푸스발 운텀 하켄크로이츠"(Fußball unterm Hakenkreuz, 하켄크로이츠 하에서의 축구)에 명시되었다.<ref name="NaziEraDFB">Nils Havemann Fußball unterm Hakenkreuz. Der DFB zwischen Sport, Politik und Kommerz Bonn: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6.</ref> "글라이히샬퉁" (Gleichschaltung)에 따르면, DFB는 약한 구조의 국가리그에 비교하여, 강한 구조를 가진 지역리그인 새로운 가우 구조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1933년]] [[7월 9일]] [[베를린]] 회의에서 DFB는 이를 이행하였다. 그 후 [[아돌프 히틀러]]는 축구계에서 [[공산주의|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새 조직인 독일 제국 체육 리그(Deutscher Reichsbund für Leibesübungen)는 린네만에 의해 축구부에 도입되었지만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DFB는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국제 무대에서, 독일 국가대표는 [[1934년]]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관전한 경기에서의 0-2 완패는 DFB의 명예를 추락시켰다. 제국 소년부 (Reichsjugendführer) [[발두르 폰 쉬라흐]]와 히틀러 유소년단은 [[1933년]]이래 모든 스포츠계를 점령한 제국 체육부 (Reichssportführer) [[한스 폰 차머]]와 오스텐과의 합의 하에 제국 스포츠 유소년 축구(U-16)을 점령하였다. 이후 [[1938년 FIFA 월드컵]]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기권하였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었고, [[오스트리아 축구 협회]]는 독일 협회와 합쳐졌다. 새 감독 [[제프 헤르베거]]는 [[오스트리아]] 선수 사용권한을 받았으나, [[1938년 FIFA 월드컵]] 1라운드에서 탈락하였고, 나치 정치에 있어서 축구의 영향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4명의 독일인 (한스 야콥, [[알빈 키칭거]], 루드비히 골드브루너, 그리고 에른스트 레흐너) 는 [[1937년]] [[6월 20일]]의 [[암스테르담]]에서 개최한 FIFA 친선전에서 서부 유럽을 대표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두명 (키칭거와 안데를 쿠퍼) 는 [[1938년]] [[10월 26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FIFA 대륙 대표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