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공작부인 잉글랜드의 마틸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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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
[[1165년]] [[쾰른]] [[대주교]] [[라이날드 폰 다셀]]이 마틸다의 결혼 협상을 위해 독일측 대표로 [[루앙]]에 있는 헨리 2세의 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주교를 맞이하기로 한 [[제2대 레스터 백작 로베르 (보몽)|레스터 백작 보몽의 로베르]]가 대주교는 [[대립교황 빅토르 4세]]를 지지하면서 교회를 분열시킨 혐의가 있다면서 만나기를 거부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헨리 2세는 원래 마틸다를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과 결혼시킬 생각이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에 사자공 하인리히와 결혼하기로 하고 마틸다를 [[1167년]] 9월에 잉글랜드에서 출발시켰다.
 
독일에 도착한 마틸다는 [[작센 공작]] 및 [[바바리아 공작]]인 [[하인리히 사자공|사자공 하인리히]]와 [[1168년]] [[2월 1일]] [[민덴]] 성당에서 결혼했다. 둘의 결혼 생활에서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그 중 한 명이 [[오토 4세]]이다.
 
몇몇 자료에서는 그 외에 3명의 아이들이 더 있다고 나타난다.
 
== 섭정과 추방 생활 ==
마틸다와 결혼할 무렵의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의 동맹자 중 가장 강력했다. 그리하여 [[1172년]]부터 [[1173년]]까지 하인리히가 십자군 성지를 방문하느라 자리를 비울 때 마틸다가 대신해서 광대한 영지를 다스렸다. [[1174년]] 하인리히가 프리드리히 1세와의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고, 몇 년 간의 다툼 끝에 위험에 처하게 되자 [[1182년]]에 둘은 독일 땅에서 도망쳐 장인 헨리 2세의 궁이 있는 [[노르망디]]로 갔다. 프랑스 북부 [[아르장탕]]의 왕궁에 머무는 동안 [[트루바두르]] [[보른의 베르트랑]]을 만났고, 베르트랑은 그녀를 "Elena" 또는 "Lana"라 부르면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두 개의 시를 썼다.
 
마틸다의 가족들은 헨리 2세의 강력한 보호 아래 노르망디에 머물고 있다가 [[1185년]]이 되어서 작센 영지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나, [[1189년]] 초반에 황제는 하인리히에게 다시금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때는 마틸다는 브라운슈바이크에 남아서 남편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3개월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 바깥 고리 ==
*Betran de Born, [http://www.cam.org/~malcova/troubadours/bertran_de_born/poem8.html Casutz sui de mal en pena]
*Bertran de Born, [http://www.cam.org/~malcova/troubadours/bertran_de_born/poem9.html Ges de disnar non for'oimais maitis]
 
[[분류:작센 공작 부인]]
[[분류:플랜태저넷 왕가]]
[[분류:영국의 공주]]
{{생애|1156|1189|작센 공작부인 마틸다 (잉글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