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청년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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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청년왕 헨리는 [[1183년]] 여름, 아버지와 동생 리처드에 대항해 리무쟁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에 사망했다. 전투 과정에서 한 거라곤 그저 자신의 용병대에 지불할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지역의 수도원을 약탈한 게 다였다. 6월 초에 [[이질]]에 걸리면서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리모주]] 근처의 마르텔로 옮겨졌다. [[6월 7일]] 그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그는 종부성사를 받았다.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뉘우치는 의미로 십자가 상 앞에서 벌거벗은 채 무릎꿇고 참회했다. [[성묘 교회]]로 순례를 떠난가기로 했던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이 후회된 젊은 왕은 친구 윌리엄 마셜에게 (아마도 십자군의 십자가가 수놓아진) 망또를 남기면서 그가 대신 받아주길예루살렘까지 바란다는가져가 간청과 함께 그가 간 예루살렘까지 갖다주라는달라는 유언도 남겼다.<ref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임종할 무렵 아버지와 화해하길 바랬으나 속임수일 것을 우려한 헨리 2세는 만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6월 11일]] 젊은 왕은 아버지가 용서의 상징으로 보내준 반지를 꼭 쥔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은 후에 헨리 2세는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한다. name="그는weir_323">{{서적 나를인용 많이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더 괴롭혀도 좋다."
|성=위어
|이름=앨리슨
|제목=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발행일자=2011-03-20
|판=1
|출판사=루비박스
|출판위치=
|isbn= 978-89-91124-00-4
|쪽=323
|인용문=
|꺾쇠표=예
}}</ref>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임종할 무렵 아버지와 화해하길 바랬으나 속임수일 것을 우려한 헨리 2세의 고문들은 만나기를 거부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ref name="weir_323" /> [[6월 11일]] 젊은 왕은 아버지가 용서의 상징으로 보내준 반지를 꼭 쥔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은 후에 헨리 2세는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는 나를 많이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더 괴롭혀도 좋다."
 
젊은 왕은 자신의 눈과 뇌, 내장은 [[샤루 수도원]]<ref>앨리슨 위어의 책에서는 헨리 2세가 그랑몽 수도원에 매장했다고 나온다.<br />{{서적 인용
사후에 그의 어머니 [[엘레오노르 (아키텐)|엘레오노르]]와 친구들이 그를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웰스 부주교]] 얼리의 토마스가 출판한 설교집에는 젊은 헨리의 시신을 북쪽의 노르망디로 옮기는 동안 발생한 기적과 같은 사건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젊은 왕은 자신의 내장과 다른 부분은 [[샤루 수도원]]에 묻히고, 나머지는 루앙의 성당에 묻혀야 한다고 했다.<ref>{{서적 인용
|성=위어
|이름=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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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위치=
|isbn= 978-89-91124-00-4
|쪽=324
|인용문=
|꺾쇠표=예
}}</ref>에 묻히고, 나머지는 루앙의 성당에 묻혀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장례 행렬이 북쪽을 향해 [[르망]]을 지날 무렵 사람들이 몰려들어 젊은 왕의 시신을 그곳 성당에 매장했고, 루앙의 주민들은 분노에 휩싸여 왕의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르망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헨리 2세가 중재에 나서 결국 아들의 소원대로 루앙에 묻어주기로 결정했다.
}}</ref>
 
그의 유해는 루앙 대성당의 제단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유해 맞은 편에는 계속해서 그와 싸웠던, 때론 합동으로 아버지와 싸웠던 동생 [[리처드 1세|리처드]]의 무덤이 있다.<ref>루앙의 리처드 1세 무덤은 그의 심장을 성유물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해당 성당의 중요한 보물 중의 하나이다. 그의 나머지 신체는 그의 부모와 함께 [[퐁트브로 수도원]]에 있다.</ref> 그의 부인이었던 마르가리트의 무덤 역시 같은 루앙 대주교구에 있으며 도보로 갈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