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프루아 2세 드 브르타뉴 공작: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32번째 줄:
제프리는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네 번째로 태어난 아들로, [[청년왕 헨리]]와 [[리처드 1세|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그의 형이며 [[작센 공작부인 마틸다 (잉글랜드)|작센 공작부인 마틸다]]가 누나이다. 제프리 밑으로 [[카스티야 왕비 엘레오노르 (잉글랜드)|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 [[시실리 왕비 조안 (잉글랜드)|시실리의 조안]], [[존 (잉글랜드)|존]]이 있다. 이름은 할아버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조프루아 5세]]에서 따왔다.
 
헨리 2세는 [[브르타뉴]] 영지에 대한 간접 통치 정책을 변경시켜서 좀 더 직접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다.<ref>Everard, Judith. '' Brittany and the Angevins: Province and Empire, 1158–1203'', (2000), pp.41–42.</ref> 그리하여 헨리는 [[공작 코낭 4세 (브르타뉴)|브르타뉴 공작 코낭 4세]]와 전투를 벌여 평화 협정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후 브르타뉴의 토착 귀족들이 코낭 4세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오히려 헨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1164년]] 헨리는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의 경계선 부근의 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전쟁에 개입했다.<ref name=Everard2000P42>Everard, Judith. '' Brittany and the Angevins: Province and Empire, 1158–1203'', (2000), p.42.</ref> [[1166년]] 브르타뉴 지역 봉신들을 응징하기 위해 침공한 뒤 코낭의 작위를 박탈하고 공작 작위를 코낭의 다섯 살 난 외동딸 상속녀 콩스탕스에게 넘기도록 했다. 그리고는 8살의 제프리와 콩스탕스를 약혼시켰다.<ref name=Everard2000P42/><ref>{{서적 인용
|성=위어
|이름=앨리슨
44번째 줄:
|인용문=
|꺾쇠표=예
}}</ref> 이런 작위 승계 방식은 중세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코낭이 이후에 아들을 가지게 된다면 그 아들이 적법한 공작 승계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sfn|<ref>Everard|page=, Judith. '' Brittany and the Angevins: Province and Empire, 1158–1203'', 2000, pp.43}}.</ref><ref>헨리가 직접 브르타뉴 공작 작위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오직 아들 제프리와 콩스탕스를 통해 자기 밑에 두었을 뿐이다.</ref>{{sfn|<ref>Everard|page=43-44}}, Judith. '' Brittany and the Angevins: Province and Empire, 1158–1203'', 2000, pp.43–44.</ref> 콩스탕스와 제프리가 실제로 결혼한 때는 약혼한지 15년만인 [[1181년]] 7월이다.<ref>Warren, Wilfred Lewis, ''King Joh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3), 574.</ref>
 
한편 날로 높아지던 헨리와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긴장감은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로 보낼 자금 모집 방법과 관련한 사소한 논쟁으로 [[1167년]]의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루이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브르타뉴와 자신의 프랑스 연합을 만들어 노르망디로 침공했다. 헨리는 이에 대응해서 루이의 주요 무기고인 쇼몽 쉬르 엡트를 공격해 마을을 불태우고 루이가 동맹들을 배신하고 혼자 평화 협정을 맺도록 만들었다. 그제서야 여유가 생긴 헨리는 여전히 자신의 브르타뉴 지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획책하는 봉신들을 응징하기 위해 브르타뉴로 달려가 굴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