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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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n costume-Hanbok-Dangui-Seuranchima-01.jpg|thumb|240px|한복의 일종인 [[당의]](唐衣)]]
'''한복'''(韓服, {{llang|ko-KP문화어|조선옷}})은 [[한민족]] 고유의 옷이다.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고유한 의복을 입었으며 위정자와 귀족은 외래 문물의 영향을 받은 복식을 도입해 입으면서 유행을 만들어 내고 격식에 따라 다른 옷을 입기도 하였다.<ref>McCallion, Aleasha; Condra, Jill. 《The Greenwood Encyclopedia of Clothing Through World History》, Greenwood Publishing Group. p. 221 - 228쪽. ISBN 03133366440-313-33664-4 </ref> 색이 들어간 천은 관복으로서 각 시대의 위정자가 내린 복식금제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었으나<ref name="김경수"></ref> 대다수의 평민들은 흰색 옷을 즐겨 입었으며 한복의 기본 구성인 치마와 저고리, 바지 등은 변치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ref>김성혁, 《레스토랑 서비스》, 백산출판사, 2000년, 84쪽</ref>
 
한복은 전통 복식으로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기본적으로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은 한국인의 체형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활동성을 중시<ref>청곡, 《수의 시대 대한민국이 미래다》, 김&정. 2005년. 181쪽</ref>하며 딱 붙는 옷이 아니어서 살집이 있다고 해도 꾸밈에 따라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또한 천 자체를 보면 직선형이지만 몸에 입을 경우 곡선이 살아나게 도와주는 미적 특징도 나타나며<ref name="정형"></ref><ref name="매너학">채용식,《매너학》, 학문사, 2004년. 19쪽</ref> 이에 관련하여서는 주머니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기모노]]나 [[치파오]] 등 이웃 국가들의 복식과 달리 한복은 저고리와 치마, 즉 상·하의가 분리<ref name="정형">정형, 《사진 통계와 함께 읽는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다락원, 2009년. 145쪽</ref>되어 있어 형태상으로 구분된다.
 
현대의 한복은 보통 [[조선|조선 시대]]에 착용했던 한복과 유사성이 크며 명절이나 격식을 갖추는 자리에서 입는 경우가 많다. 개량한복은 생활의 편리함을 강조하고 있어 20세기 동안 그 외형이 여러 변화를 겪었다.<ref>{{언어고리|en}}[http://english.kbs.co.kr/korea/culture/clothing/ink_clt.html Korean Traditional Clothing] KBS 2011-07-28 검색해봄</ref> 한복도 의복이므로 기성복처럼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요구에 따라 색과 소재, 특징 등을 새롭게 접목하며 이러한 시도는 여러 한복 디자이너들에 의해 현재에도 시도되고 있다.
 
== 한복의 구성 ==
일반적으로 옷에는 속옷부터 바지와 치마 등을 포함하는 하의, 셔츠나 남방을 가리키는 상의 등 그 쓰임새와 입는 용도에 따라 구분 지어져 있다. 한복에도 두루마기, 포, 바지, 마고자 등 착용 시 가장 기본부터 입는 옷부터 맨 위에 걸치는 [[두루마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며 이들 중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구성하는 한복에 대해 다룬다.
 
=== 저고리 ===
{{본문|저고리}}
[[파일:Jeogori.png|thumb|left|250px|저고리의 구조<ref group="주해">배래는 소매에서 고름으로 오는 둥그런 소매의 부분을 일컫는다. 끝동이란 저고리 소매의 끝으로 보통 저고리 전체의 색과 다른 색깔을 취한다.</ref>]]
[[File파일:Hanbok scheme.svg|thumb|1. 화장 2. 고대 3. 소매부리 4. 소매 5. 고름 6. 우 7. 도련 8, 11. 진동 9. 길 10. 배래 12. 깃 13. 동정]]
[[저고리]]는 한복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상의로서 남자와 여자 모두가 입는 옷이다. 저고리는 역사상 신분의 상하와 유행에 가장 민감한 옷<ref>[http://www.fnnews.com/view?ra=Sent13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2347797&cDateYear=2011&cDateMonth=06&cDateDay=26 아름다운 우리 저고리] 파이낸셜타임스 2011-06-26, 2011-07-31 검색해봄
.</ref>으로서 여전히 한복 연구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다. 팔과 상체를 덮는 저고리는 그 부위에 따라 길, 깃, [[동정]], [[옷고름|고름]], 소매 등으로 구성된다.<ref>[http://www.thingskorean.com/kor/contents/clothes/man.asp 저고리] ThingsKorean.com 2011-07-31 검색해봄.</ref>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ref>[http://costumekorea.culturecontent.com/age/search_age.asp?code=CP0213300027&age=3&mode=view&navi=저고리&where=dress&gotopage=1&pagemode=search_result 저고리] 2011-07-31 검색해봄.</ref> 보통 깃은 목둘레를 장식하며 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려 몸을 여미는 역할을 한다. 옷고름은 의복을 리본형태로 묶어 정돈하는 목적이지만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의복의 관리면에서 세탁하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이용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로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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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한복의 경우 저고리에 끝동이 있어 자수를 놓기도 한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0911002240&subctg1=&subctg2= 최근 인기 한복과 잘 입는 노하우] 세계일보 2009-09-11</ref> 남성의 저고리가 상대적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면 여성의 경우 조선 시대 동안 급격하게 짧아져 19세기 후반에 그 길이가 가장 짧아진다. 그러나 개량 운동으로 근현대의 저고리는 좀 더 길어져 허리선 조금 윗선까지 올라온다. 이에 따라 고름도 좀 더 길어지고 넓어지게 된다. 이에 반해 남자의 저고리는 등 전체를 덮을 정도로 길고 고름도 긴 편이었다.<ref>[http://211.57.113.105/sch/p_museum/full.cgi?v_db=1&v_doc_no=00041645&v_list=0&v_kw_str=D2:CX%20AND%20(%B0%ED%B8%AE) 옥양목저고리] 국가문화유산정보서비스 2011-07-31 검색해봄.</ref>
 
=== 치마 ===
{{본문|치마}}
치마는 [[한자]]로 裳(상) 혹은 裙(군)으로 쓰며 한복에서는 하의를 가리키되 여자 한복에 한정된다. 저고리의 경우 성별에 관계 없이 입었지만 치마는 여성만에 한정됐다는 사실이 다르다. 고구려 벽화와 경주 벽화분을 대조해볼 때 고구려 여성은 치마를 먼저 입고 그 위에 저고리를 입었으며 치마 주변(허리춤)에 띠를 두른 것으로 파악된다.<ref name="Koreana">[http://eng.actakoreana.org/clickkorea/text/13-Clothing/13-95aut-charateristics.html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 Costume and Its Development] 조우현, 코레아나 제 9권</ref>그러나 치마를 입고 저고리를 입는 것은 고려 시대 전까지는 관습처럼 굳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f name="Hanstyle">[http://www.han-style.com/hanbok/history/hanbok_style.jsp 유행과 우리옷] 한스타일(Korea The Sense), 2011-08-12 검색해봄.</ref> 고구려 시대에는 서구형처럼 황금비례를 추구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는 긴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어 [[당나라]]의 형태와 아주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ref>[http://img.kisti.re.kr/originalView/originalView.jsp?url=/soc_img/society//ksct/GORHA1/2001/y2001m10a/GORHA1_2001_y2001m10a_63.pdf 〈한복 치마에 관한 연구- 착장미를 중심으로〉] 이수현, 조우현, 인하대학교 의류학과. 2011-07-31 검색해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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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치마는 그 착장법이 뒤여밈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의상과 약간 다른 특징이 있다. [[인도]]의 전통 의상인 사리<ref>Miller, Daniel & Mukulika Banerjee , 《"The Sari"》, 2004. Berg Publishers</ref>는 치마를 두른 후 앞으로 묶으며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전통 복식인 케바야<ref>Jill Forshee, 《Culture and customs of Indonesia》,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6. 237쪽</ref>, [[캄보디아]]의 삼포트<ref>{{언어고리|en}}[http://www.bookrags.com/research/clothing-traditionalcambodia-ema-02/ Clothing, Traditional—Cambodia] 2011-09-11 검색해봄</ref><ref>{{언어고리|en}}[http://sampot.com/index.php?route=product/category&path=59 Sampot] 2011-09-11 검색해봄</ref> 등은 허리 앞에서 묶어 앞에 혁띠를 착용하거나 앞으로 여민다.
 
=== 바지 ===
{{본문|바지}}
[[File파일:Gama2 crop.jpg|left|thumb|170px|가마를 이는 남자들]]
바지는 한복에서 하의를 가리킨다. 꼭 여성이 입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나 대개 남자 한복을 지칭하며 사실 한복이 아니더라도 [[청바지]] 등의 일반적인 의복을 가리킨다. 한복의 바지는 6세기까지 신분의 차이 없이 그냥 바지부리를 여맸으나 7세기부터는 여매는 것 대신 선으로 두르는 형태가 생겨난다.<ref>박선희, 《한국고대복식》,지식산업사, 2002년. 제2부 한국복식의 원형 부분 참조.</ref>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겹고, 단고 혹은 단순히 고로 표기하고 있다. 겹고라는 의미는 겹바지임을 가리킨다.<ref name="김은정">김은정, 〈남자 한복 바지의 구성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144호(2005), 910-91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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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라는 용어는 "把持"(파지)라고 [[정인지]]가 기록한 것이 최초<ref>이어령, 《우리문화 박물지》, 디자인하우스, 2007년. 271쪽</ref>이며 왕과 왕비의 바지는 특별히 '봉디'(봉지)라고 별도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00058837 바지] E-museum-바지, 2011년 8월 12일 검색해봄.</ref>
 
=== ===
{{본문|도포}}
포는 [[도포]]를 의미하는 말로서 외투의 일종이며 방한복으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예를 갖추는 자리에서는 꼭 입는다.<ref>오정교, 《해동검도》, 진한도서, 2004년, 213쪽</ref> [[두루마기]]도 사실상 포의 일종이다. 포는 중국과 일본의 의복과 [[한국]]의 의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여성의 의복을 보았을 때 한복은 저고리-치마를 기본형으로 하고 포를 걸치지만 중국과 일본의 옷은 원피스에 해당하므로 그 형상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ref>이경명, 《태권도 품새론》, 상아기획, 2005년, 194-195쪽</ref> 여자 한복에 저고리가 있다면 남자 한복에는 외의인 포가 있었으며 이는 삼국시대 이후로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복을 아우르는 전통이었다. 남자 한복의 선을 나타내기도 했다.<ref>안용규, 《태권도 탐구논리》, 2006년, 151, 154, 171쪽</ref>
 
조선 시대의 남자 복식은 후대에 두루마기가 포를 대체했으므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하여 보았을 때 조선 전후기의 특징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ref name="성기옥"></ref>
 
=== 조끼와 마고자 ===
{{본문|조끼|마고자}}
안에 덧대어 입는 저고리인 덧저고리와 흡사한 개념을 통칭하여 쓰는 말인 조끼는 흔히 서양 복식에서 베스트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20401032030025003 편하고 개성 있게… 생활한복은 ‘실용패션’] 문화일보 2008-02-04</ref> 조끼와 마고자가 다른 복식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 왕조 말엽에 유입되었다는 데 있다.<ref name="국민일보">[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398125&cp=nv 매혹의 한민족 DNA가 켜켜이… 시대별로 보는 한복의 변천사] 국민일보 2010-02-1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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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 순서로 보면 저고리 위에 조끼를 입고 그 위에 마고자를 입은 뒤 외출 시에는 두루마기를 둘렀다.<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509/e2005091514483847670.htm 한복 입는 법] 서울경제 2009-09-15</ref>
 
== 역사 ==
[[File파일:Danwon-Ssireum.jpg|thumb|right|150px|단원 [[김홍도]]의 민속화 씨름]]
한복의 시초를 보면 고대 동북아시아의 스키타이-시베리아 문화에서 건너온 것으로 유목민의 다양한 의상 중의 하나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ref>김문자, 《한국복식문화의 원류》, 1994, 7-15</ref><ref>이경자, 《우리옷의 전통양식》,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소개하는 글"에서 발췌</ref> 동북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가장 초기 증거는 [[흉노]]족의 집단 매장지인 노인 울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몽골]] 북부에 위치한다.<ref>유순례, 〈몽골과 한국의 전통복식 미의식 비교에 대한 연구〉, 한국복식사연구회,2006, v. 6, 183-185쪽</ref> 한편, 한복 자체의 디자인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증거는 기원전 3세기 전 [[고구려]] 벽화에 담겨 있다.<ref>Nelson, Sarah,《''The archaeology of Kore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ISBN 05214078340-521-40783-4,7쪽, 213-214쪽</ref><ref>{{언어고리|en}}[http://www.arirang.co.kr/News/News_Print.asp?type=news&nseq=68777 Faces of Korea- Hanbok] 아리랑TV 2007-02-15</ref>
 
생활 속의 움직임을 확보하는 의복을 선호하는 유목민의 복식과 유사하게 한복은 움직임의 편리함을 강조했기에<ref>[http://www.wowtv.co.kr/news/wownews/view_nhn.asp?bcode=T01010000&artid=A201104060118 옷 패션 그리고 건강-<2>한복은 과학이다] 한국경제 2011-04-06</ref> 한복 바지는 [[모내기]]와 [[씨름]]을 할 때도 착용이 가능했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398130&cp=nv 인체 순환까지 배려한 ‘직선·평면 재단’의 미학… 한복속에 감춰진 과학 이야기] 국민일보 2010-02-11</ref>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한복의 골격인 저고리,바지,치마라는 기본구조는 그대로 이어지되<ref name="국민일보"></ref> 길이나 폭, 형태 등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였다. 폭에 관해서는 넓은 바지, 좁은바지, 발목에 주름잡혀 좁은발목형태의 바지, 넓게 펼쳐진 밑단의 바지 등 폭과 길이가 다채로웠으며 허리 정도의 길이에 오는 저고리는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남녀 구분 없이 입었다. <ref>[http://www.korea.net/news/News/LangView.asp?serial_no=20081111006 The beauty of Korean tradition - Hanbok] Korea.net 2008-11-20 작성. 2011-08-24 검색해봄.</ref>
 
=== 상고시대 복식 ===
[[고구려]] 복식은 양성 모두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왔으며 아래는 바지를 입어 귀부인일수록 바지의 폭이 넓어지는 특징이 있었다.<ref>김경수, 《한국사 이야기》, 돋을새김,2009년, 148쪽</ref> 다만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여자는 저고리에 바지나 치마를, 혹은 저고리와 치마를 겸해서 입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복식과 많이 다르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좌임, 우임, 합임(양쪽 어느 곳으로 모으지 않고 가운데로 모아 입은 형태) 등 세 종류가 공존하여 나타났고 상투나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머리 형태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명주와 무명, 삼베를 이용하여 미적 측면도 추구한 점은 유목 민족과 구분지을 수 있다.<ref>김용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2000년, 3쪽</ref> 또한 고구려인은 항상 전투복과 같은 옷을 입고 다녀 비상 사태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ref>김덕형, 《고구려는 한국사다》, 깊은강, 2004년, 19쪽</ref>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옷의 활동성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복식이 뒷받침되었기에 전쟁에서도 능할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양잠이 발달했으며 옷감의 색 또한 다양해 흰색, 검정색, 노란색, 보라색 등이 쓰였다.<ref>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8년, 128쪽</ref>
 
[[백제]]의 복식은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움이 두드러졌으며 고구려에 비해서는 여성적이다. [[고이왕]] 27년(260년)에 정해진 관복의 제도에서는 관복의 색감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정도로 의복이 발달되어있었다. 복식은 고구려와 흡사했으며 공식적이거나 그 중요성이 높을 경우 여인들은 머리 장식을 했다.<ref name="우리옷만들기"></ref> 남자의 경우 고구려와 비슷하게 포를 넓게 하여 항시 입었던 것은 동일했다. 때문에 관모에도 신하들의 직급에 따라 장식 자체가 구분되었으며 임금은 금제, [[좌평]]~[[나솔]]까지는 은제를 부착하도록 했다.<ref>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년, 337쪽</ref><ref>김병미, 《공주대학교 백제문화 제38집》〈백제옷의 직물과 문양〉21쪽~35쪽 참조</ref>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발전한 만큼 훗날 두 나라와 중국의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복식에 대한 개념도 성장했다. 신라 때 전해진 당나라의 복식을 통해 남자 귀족들은 먼저 당나라의 복식을 입게 되었으며<ref>[http://www2.mhj21.com/sub_read.html?uid=27142&section=sc120 여자 한복 치마의 종류, 겹치마, 대란치마, 속치마] 문화저널 2010-03-26</ref> 신라가 당의 복식을 들여온 것은 진덕여왕 2년(648)을 전후한 시기로서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한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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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도 이중적인 복식 제도를 취한 점이 비슷하여 고위층, 귀족들은 당나라의 복식문화를 수용하여 당나라의 옷 형태가 융화되는 한편, 백성들은 기존에 입던 저고리바지, 저고리치마의 형태를 입었다. 더군다나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았던 신라는 독자적인 복식을 겸용하여 발달해 나갔다.
 
삼국시대는 문헌과 자료가 많이 부족하여 고증이나 복원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에 따라 [[가야]]의 경우에도 그 복식을 고증하는 일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고령군]]은 대가야인의 복식이 목부분이 둥근 곡선 깃 저고리를 입는 점에서 신라와 다르다는 사실과 함께 가야제 철제도구에서 나타나는 무늬들을 세부 문양으로 채택했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416852 대가야시대 옷은 어땠을까] 연합뉴스 2006-09-21</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186049 1500년 전 대가야인 재현] 뉴시스 2006-09-21</ref>
 
삼국시대에 귀족 여성들은 아주 긴 형태의 치마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입어 허리에 혁띠를 착용했으며 남성의 경우 펑퍼짐한 형태의 바지를 입고 좁고 남방과 비슷한 형태의 좁은 저고리가 허리 부근까지 오도록 입어 혁띠를 착용했다. 이 때 저고리는 단을 접어 입는 것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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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국 시대 ===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유민에 대한 포용 정책과 함께 [[당나라]]와의 교류가 융성하면서 복식 또한 매우 발달했다. 특별히 골품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분에 따라 문양이나 착용 여부가 정해졌다. 귀족 부인들에게 중국식 복식이 허용된 것은 신라가 통일을 이루기 조금 전인 문무왕 4년(664년)부터이며 삼국시대와 달리 어깨끈이 있는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은 형상이 [[경주시]] [[용강동 (경주시)|용강동]]에서 발견된 바 있다.<ref name="임경화"></ref> 관복제도가 정식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시기임과 동시에 여자 한복에 대해서도 중국식 특성이 많이 반영되어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0016765 설한복은 은은한 색상으로] 문화일보 2003-02-11</ref><ref name="국민일보">[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398125&cp=nv 매혹의 한민족 DNA가 켜켜이… 시대별로 보는 한복의 변천사] 국민일보 2010-02-11</ref>
 
한편,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초기에는 포 형태의 전통 관복을 입는 등 고구려의 복식제도를 계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3대 문왕 이후에는 당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귀족층에서는 중국의 관복제도를 모습을 보였고, 일반 백성들은 고구려의 복식과 주변 소수 민족(말갈, 거란 등)들의 복식도 어느정도 혼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f>학술 교류관계를 통해 본 발해의 복식문화 연구 - 교류시 품목을 중심으로 - <전현실, 강순제 저> 결론 부분</ref>
 
=== 고려 ===
고려 왕조는 [[광종]] 때에 이르러 대대적인 왕권 강화가 이뤄진다. 광종 즉위 당시 고려는 출신에 따라 의복도 달라 색이나 특징조차 구분된 것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따라 광종은 과거제 시행 2년 뒤, 보라색, 붉은색, 연두색, 자주색 네 종의 소매 색깔을 규정했다.<ref>최범서, 《이야기 고려왕조사》, 청아출판사, 1996년, 24쪽</ref>
 
다른 나라의 의복이 한복에 미친 영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거나 피상적이었지만 몽골의 경우만이 이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한복에 시각적인 변화를 실증적으로 일으켰다. [[고려]]가 13세기 [[몽골 제국]]과 부마국의 관계를 맺게 되자 몽골 공주가 고려 왕실로 오게 되었고 몽골 의복이 고려 궁중 복식에도 일부 반영되어<ref>[http://uriculture.com/s_menu.html?menu_mcat=100540&menu_cat=100001&img_num=sub1 UriCulture.com] 전남대학교 공과대학 의복연구소 2011-08-15 검색해봄.</ref> 넓은 고름이 쓰이면서 허리춤에 혁띠를 묶는 것을 대신하였다. [[원나라]]의 내정 간섭 영향은 왕후와 후궁, 귀족들의 의복에도 변화를 야기했다.<ref>김기선 〈Information about Mongolian pigtail 몽골의 辮髮에 대하여〉, The Institute of Asian Ethno-Forms and Culture, 2005, v. 5, 81-97쪽</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8&aid=0000100944&(37) ‘고려풍’과 ‘몽골풍’] 한겨레 2005-02-28</ref><ref>[http://www1.chinaculture.org/library/2008-01/28/content_28414.htm ChinaCulture.org]</ref> 그러나 원나라의 복식 자체가 한복의 원형에 영향을 끼쳐 발전 요소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증거로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로 지나면서 길이가 갈수로 짧아진 저고리를 살펴볼 수 있다. 백성들 모두가 입었던 저고리가 만약 원나라의 한시적인 영향 하에서 변형되었다면 그 길이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길어져야 하지만 저고리의 길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치마의 길이나 모습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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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Korea-National.Treasure-110-Yi.Jehyung-portrait-NMK.jpg|고려 후반의 [[이제현 초상]]</gallery>
 
=== 조선 시대 ===
조선 초 한복은 소매가 헐렁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실례를 보여주는 유물은 [[박익]](1332–1398)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98196 묘]에서 발굴된 벽화이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4590000,38&queryText=(`박익`) 밀양고법리박익벽화묘 ( 密陽古法里朴翊壁畵墓 )]. 문화재청</ref><ref>조유전, 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 황금부엉이. 2004년. 102-106쪽 참고</ref> 조선은 개국 후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복식에서도 계층적 신분질서를 여러 모로 규정하여 치마의 경우 조선 전기에 출토된 [[스란치마]]는 [[명나라]] 시대의 치마와 거의 유사하고 화문 또한 유사성이 많았다. 그러면서 저고리의 길이는 길어지고 치마는 허리에서입는 형태여서 폭이 넓어지다가<ref name="임경화"></ref> 16세기 들어 저고리는 허리 윗부분으로 그 길이가 짧아졌으며 좀 더 가슴 부분으로 올라갔다.
 
조선 중기에 나타나는 복식의 특징은 남성과 여성한복 모두 대체적으로 등길이가 길어 허리 밑까지 내려올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짧아졌다는 점이다.<ref>KBS TV조선왕조실록 제작팀, 《조선은 양반의 나라가 아니오》, 가람기획, 2001년. 33쪽</ref> 여성의 저고리는 이러한 추세를 바탕으로 조선 말엽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길이가 짧아지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좀 더 수치를 크게 입었다면 후기에는 품도 몸에 맞도록 입게 되었다. 또한 저고리가 치마말기를 가려 주지 못함에 따라 치마와 저고리 사이의 겨드랑이 밑을 가려 주기 위하여, 한 자가량 되는 넓은 띠를 이 부분에 매었다. 이러한 변화로 조선 말엽, 저고리의 길이는 축소화가 진행되는 반면 치마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길어지고 폭도 넓어진다.<ref>박명희, 김승혜, 〈한복 차림새의 변천을 통해서 본 한국인의 미의식〉, 생활문화·예술논집 제 19권, 1996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ref> 그러다 18~19세기에는 종 모양처럼 저고리의 실루엣이 봉긋해지는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ref>금기숙, 《조선복식미술》, 열완당, 1994년, 43쪽 : ISBN 89-30110301-391039-8 p.43</ref><ref name="Contemporary Artwork of Women">{{언어고리|en}}[http://medieval-baltic.us/korot2.html Contemporary Artwork of Korean Women] Medieval Baltics.com 2011-09-11 검색해봄</ref>
 
오늘날의 한복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한복의 직계이며 조선시대의 것과 흡사하지만 19세기의 한복,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형태와 가장 비슷하다. 500년 조선 통치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 유행을 타기도 했으며 현재에 이르러 대부분의 한복을 지칭하는 형태로 정착하게 됐다.
 
=== 근, 현대 ===
일제 시대에는 소위 [[신여성]]들이 짧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어 개량한복의 시초가 나타났고 한동안 이러한 형태의 복장이 신여성의 복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ref>허영란, 《일상생활로 본 한국근현대사》, 2006년, 책과함께, 37쪽</ref>
 
[[File파일:6.25 전쟁 시 한복 여성.jpg|right|thumb|170px|[[한국 전쟁]] 당시 한복을 입은 여성 (대구)]]
 
[[1960년]]대까지도 한복을 입은 시민들의 활보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양복과 옷감의 보급화가 확산되면서 한복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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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파일:Korea-History-1910-1920-Korean.mother.child-Carpenter.Collection.jpg.jpg|left|thumb|180px|한복을 입은 모녀(1910~20년대로 추정)]]
 
1970년대 이후 한복은 그 기능이 예복으로 국한되면서 생활보다는 미적인 기준을 강조해 이를 계승하려는 노력과 함께 좀 더 창조적인 면모를 두드러지게 하도록 한복이 변화되었다. 이에 따라 더욱 원색적이고 라인을 살리는 형태<ref name="이경자">이경자, 《노리개》,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년. 19쪽</ref>의 한복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을 전후로 해 여러 단체들의 한복 입기 운동 전개로 많은 관심을 얻었으며 한복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된다.<ref name="임경화">[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c8f2a0d0c6ad8f6d# 치마의 장식요소와 표현성에 관한 연구 : 조선시대부터 2001년까지] 임경화, 가톨릭대학교대학원 의류학전공 2002년, 104쪽, 114-116쪽</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3&aid=0000003363 긴조 9호세대 비사-굿판을 벌여라] 주간경향 2004-02-27</ref> 1996년 문화관광부가 시작한 "한복입는 날" 행사는 대중의 한복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ref>안병선, 《21세기 황금시장 문화산업》 매일경제신문사, 2000년, 115쪽</ref><ref>김병욱, 《재테크 창업 가이드》, 킴스정보연구소, 2004년, 32쪽</ref>
 
과거의 사극이 고급스럽고 화려한 면모를 지닌 한복을 선보였다면 현대 사극에서 나타나는 한복의 변화는 그 소재와 모양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웨딩드레스]]에 쓰이던 레이스 소재를 한복에 사용하고 저고리를 생략해 어깨를 노출하면서 치마의 가슴띠에 수를 놓거나 끈으로 처리된 한복 드레스가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ref>[http://www.etnews.com/news/detail.html?id=201009160010 11번가 인기검색어] ETN 2010-09-17</ref> 한복이 드레스의 형태를 접목한다는 것은 치마의 가슴부분을 화려하게 만들어 저고리를 입지 않아도 치마 윗부분의 장식을 통해 선과 소재의 색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9142126475&code=900305 한복, ‘정갈한 마음’을 입다] 경향신문 2010-09-14</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129016012 전통·퓨전 한복 디자이너가 말하는 설빔 트렌드] 서울신문 2011-01-29</ref> 일례로 현대적인 감성에 궁중을 배경으로 하여 한복을 등장시킨 드라마 [[궁 (드라마)|궁]]에서는<ref>[http://kmomnews.hankyung.com/news/apps/news.sub_view?popup=0&nid=05&c1=05&c2=05&c3=00&nkey=201107181711161 한복이 덥다는 것은 편견, 시원하고 섹시한 여름한복 출시] 한경닷컴-키즈맘, 2011-07-18, 2011-08-03 검색해봄.</ref> 기장이 훨씬 짧은 형태의 한복이 미니드레스와 접목되었다. 서구 문화에서 나타나는 의복의 개념을 한복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꼭 사극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1980년대에 국제적인 행사를 주최하면서 화려함을 중시했던 것과 달리 1990년대부터는 치마와 섶에 자수를 하거나 박장식을 하던 유행이 사그라들었다. 대신 생활 한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원피스]]처럼 한복을 변형하여 치마 길이는 짧게 했다.<ref name="임경화"></ref>
 
한복이 비싸기도 하고 입을 경우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를 역으로 이용해 한복 대여업체들이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추세다.<ref>[http://www.wowtv.co.kr/news/wownews/view_nhn.asp?bcode=T01010000&artid=A201109190143 한복, 필요할때 `새옷처럼` 빌려입자] 한국경제 2011-09-19</ref> 좋은 옷을 특별한 날에 입기 위한 소비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소비자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한복을 입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 형태도 단순한 형태가 아닌 창작 한복과 퓨전 한복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기에 소비자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하는 데<ref>[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5&c1=05&c2=05&c3=00&nkey=201007201030363&mode=sub_view 결혼식 한복 ‘사야 해, 말아야 해?’]</ref> 바람직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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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래 문물의 영향 ==
[[File파일:Korean.Dance-01.jpg|right|thumb|200px|몸에 달라붙게 하고 움직임을 용이하게 한 현대한국무용복]]
외래 문물의 영향은 상류층의 주도로 일어났으며 전통 한복과는 구분지어졌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문물의 영향을 받아 한복에 가미된 경우도 생겨났으며 이는 20세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ref name="hankook"></ref>
 
[[고구려]]는 중국 복식을 기본으로 하여 유사했으며<ref>안상성, 《초상화란 무엇인가》, 학문사, 1998년, 142쪽</ref> [[백제]]와 [[신라]]의 복식 또한 고구려와 유사성이 짙었다.<ref>안용규, 《태권도 탐구논리》대한미디어, 2006년, 150-151쪽</ref><ref>조법종, 《이야기 한국고대사》, 청아출판사, 2007년, 274-275쪽</ref> 이는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삼국의 복식이 상당히 유사성을 띠었음을 알려준다. 백제는 복식과 관직의 전반적인 이름을 중국식으로 썼으며 이는 고구려와 신라와는 다른 점이기도 했다.<ref>이도학, 《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 2002년, 22쪽</ref> [[신라]] [[문무왕]] 4년 중국의 복식을 들여오면서 [[고려]]를 거쳐 왕실의 대례복과 관모 등에 대해서도 고유의 관념이 정립된다.<ref>KBS, 《역사스페셜2》, KBS역사스페셜, 2000년, 188쪽</ref> 하나의 증거는 여밈의 위치에 있다. 삼국시대까지 한복은 왼쪽/오른쪽 여밈이 동시에 사용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밈이 중국식으로 오른쪽여밈으로 굳어진다. 이는 중국식 복식의 전래와 한복의 특성이 병용되었음을 말하며 중국식 복식은 위정자와 귀족 사회에서 통용되었고 평민들에게는 생활 자체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은 것이었다.<ref>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2쪽, 99쪽</ref><ref>이종욱, 《신라의 역사》, 김영사, 2002년, 9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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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도 의복인지라 유행을 타지만 그 유행이 급격하게 변하거나 틀을 완전히 부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패션계에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조명<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42&aid=0000002389 오리엔탈리즘] 주간한국 2004-06-02</ref>이 시작되면서 각국의 민족 의상의 특성을 반영하는 "Ethnic Look"이 등장해<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203605 장명자 한복연구가 - “전통 그대로의 모습” 으로] 뉴시스 2006-10-13</ref> 한복도 곡선을 살리고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ref>[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2&c1=02&c2=02&c3=00&nkey=200908011545333&mode=sub_view 오리엔탈 섹시, 한복은 ‘여밈의 미학’] BNT 뉴스 2009-08-01</ref> 2000년대 후반에 들어 한복은 면, 마, 모시 등 전통 소재는 살리되 디자인을 현대화하여 저고리는 볼레로로, 마고자는 재킷을 접목하였다. 꽃봉오리처럼 펑퍼짐한 한복 치마는 그 폭을 몸에 가깝게 하여<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24/2011062401251.html 벤츠 탄 사모님도 개량 한복 찾는다] 조선일보 2011-06-25</ref> 착용에 불편이 없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겨울 한복에는 스웨이드나 가죽이 쓰이고 주름이 지는 마직 소재, 혼용으로 쓰이는 폴라폴리스 등이 생활한복 제품으로 등장하고 있다.<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702/e2007021515180647670.htm "활동 편한 생활한복 어때요"] 한국일보 2007-02-15</ref>
 
== 한복의 세계화 노력 ==
[[파일:Couple in Hanbok.jpg|left|thumb|150px|한복을 입은 두 사람의 모습]]
대한민국의 [[문화]] [[컨텐츠]]가 [[아시아]] 국가들에 많이 소개되면서 대한민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어보는 행사나 한복 구매를 사가는 경우가 상당히 늘어나고 있으며<ref>{{언어링크|en}}[http://www.theepochtimes.com/n2/life/the-traditional-hanbok-in-the-modern-world-57554.html The Traditional Hanbok in the Modern World] Epoch Times 2011-06-12, 2011-09-01 검색해봄</ref> 비슷한 예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신혼 부부들이 한복을 예단의 한 종류로 구매하는 경우도 적잖게 나타나고 있어<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021446111 "100조원대 中웨딩시장…웨딩韓流 가능성 확인했죠"] 한국경제, 2011-02-15, 2011-08-03 검색해봄.</ref> 현지 업체와 한복 업체가 제휴하여 활동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998124 안근배한복대여, 중국기업 '웨이투'와 수출 계약 체결] 뉴시스, 2009-12-14, 2011-08-03 검색해봄.</ref>
 
한편,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문화관광부]]와 민간이 참가한 한복 패션쇼와 전시회는 전세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일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ref>[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120685 '바람의 옷'한복, 세계를 홀린다··한복명품화 위해 달리는 사람들] SBS CNBC 2011-02-17</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0494934 쿠스토 달마우 "한복을 그래픽한 옷 만들것"] 매일경제 2006-03-31</ref><ref>[http://news.donga.com/3/all/20110119/34046713/1 글로벌 디자인 코리안 영 파워<2> 스페인 ‘망고 패션 어워즈’ 1등 이진윤 씨] 동아일보 2011-01-19</ref> 한복디자이너 이영희가 디자이너 이신우와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레타 포르테({{llang|fr|prêts-à-porter}})에 참가하면서 한복을 널리 알리는 전기가 마련됐다.<ref>{{언어링크|fr}}[http://www.coree-culture.org/annonce01_each.php?number=7&keyfield=&key= Le hanbok s’expose à Paris] 주프랑스한국문화원</ref><ref>{{언어링크|en}}[http://www.parisvoice.com/-archives-97-86/348-korean-designers-body-and-seoul Korean designers, body and Seoul] Paris Voice 2011-09-01검색해봄</ref> 한복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1993년 이영희의 패션쇼를 다룬 프랑스 일간지들은 한복을 일본 문화의 복식으로 오해하여 "기모노 코레앙"으로 표기했고<ref>[http://news.donga.com/3//20090120/8686347/1 명절에도 안입는 한복, 나라 밖에서 알아줄까] 동아일보 2009-09-23</ref><ref>조현용, 《우리말 깨달음사전》, 하늘연못, 2005년. 141쪽</ref><ref>[http://www.google.co.kr/search?q=kimono+cor%C3%A9en&hl=ko&newwindow=1&biw=740&bih=541&num=10&lr=lang_fr&ft=i&cr=&safe=images kimono coréen 검색결과] 현재에도 태권도나 합기도 도복을 한국의 기모노로 설명하는 검색결과를 참고할 수 있다.</ref> 프랑스의 패션 전문가들조차 한국에 대한 낮은 인식 때문에 한복을 으레 기모노로 칭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71200329119009&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7-12&officeId=00032&pageNo=19&printNo=15821&publishType=00010 한복의 멋, 佛서 격찬 받아] 경향신문 1996-07-1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11-09-02 검색해봄</ref><ref>[http://weekly.hankooki.com/lpage/goodlife/201101/wk20110111141601104970.htm 관능미 넘치는 한복의 유혹] 주간한국 2011-01-11</ref>{{#tag:ref |이영희 씨는 1997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0230032911202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0-23&officeId=00032&pageNo=12&printNo=16252&publishType=00010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모노로 한복을 생각하는 오해를 푸는 데에만 5년이 걸렸다고 밝힌 바 있다. 기모노의 해외 진출은 1960년대부터 파리를 시작으로 서구 사회에 널리 이뤄졌다.<ref>최경원, 《Worldwide Great Designer 10》, 길벗, 2006년. 323쪽</ref>|group="주해"}} 이후 한-불 수교 120주년을 앞두고 2005년 4월 초 장 피에르 모쇼 대표이사가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프레타 포르테 설립 50주년과 더불어 박람회 100회 기념행사로 한복전시회를 열겠다고 발표하면서 한복을 원용으로 삼은 여러 디자이너들의 전시회가 열려 한국 복식에 대한 이해를 드높이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ref>{{언어링크|en}}[http://www.fashionfreak.de/vol06/editorials/editorial_10en.html Pret A Porter, Paris : Special Catwalk Event in September 2005] Fashionweek Vol.06 2006-01-31</ref> 실제로 한복전시회를 본 뒤 [[2010년]] 세계적인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서울에 위치한 이영희 한복 매장을 직접 방문한 바 있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398165&cp=nv 환상적인 자수·색상에 매료… 프라다도 “원더풀”] 국민일보 2010-02-11</ref>
 
한복 패션쇼는 세계 각국에서 열리고 있으며 [[런던]] 주재 대한민국문화원은 "우리옷-배자"라는 제목으로 한복 전시회를 기획해 호평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3920675 이슈진단 '한류 쓰나미, 세계를 덮치다'-현대 가미한 美의 조화…한복 아름다움에 심취] 뉴시스, 2011-06-21, 2011-08-03 검색해봄.</ref> 한복 패션쇼는 민관 합작의 형태로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고 있으며 디자이너 [[이상봉]]은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1985년부터 [[태극기]] 이미지와 [[모시]] 소재를 선보였고<ref>[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911/h2009112422575784800.htm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 현대 의상으로 부활시켜] 한국일보 2009-11-24</ref> 한복연구가 [[이영희 (1936년)|이영희]]는 [[싱가포르]]<ref>[http://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87675&section=section4 한복디자이너 이영희, 싱가포르에서 한복 패션쇼] 2008-09-18</ref>, [[미국]] [[맨해튼]]<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2501415 <뉴욕스케치>이영희 한복 패션쇼] 2009-01-30</ref>, 파리<ref>{{언어고리|fr}}[http://www.stiletto.fr/Evenements/LEE-YOUNG-HEE-LE-DEFILE-EVENEMENT-DE-LA-HAUTE-COUTURE-A-H-2010-2011-6-357-56.html LEE YOUNG HEE, LE DEFILE EVENEMENT DE LA HAUTE COUTURE A-H 2010-2011] Stilletto.fr</ref> 등에서 한복을 주제로 한 무대를 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러 한복 디자이너들의 합동 무대 또한 [[홍콩]]<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302796 홍콩에서 한복 패션쇼 개최] 연합뉴스, 2003-01-10, 2011-08-03 검색해봄</ref>, [[런던]]<ref>[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711000300 서울, 런던서 한식-디자인 주제 대규모 설명회] 헤럴드생생뉴스 2010-07-11, 2011-08-03 검색해봄.</ref> [[모스크바]]<ref name="Hyesoon">[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63100030&ctcd=C09 “저고리는 어떤 속옷보다 섹시한 옷”] 주간조선 2011-07-04</ref>, [[상하이]]<ref>[http://artsnews.mk.co.kr/news/80164 상하이엑스포 '한국 주간', 한국 분위기 최고조 이끈다] Arts News, 2010-05-27, 2011-08-03 검색해봄.</ref>, [[아랍에미리트]]<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61706274354994 UAE '한국 춤사위에 빠지다'] 아시아뉴스 2010-06-17, 2011-08-03 검색해봄.</ref><ref>[http://news.donga.com/3//20061221/8387453/1 경동나비엔, 예술단체 공연-해외 한복패션쇼 협찬] 동아일보 2006-09-21, 2011-08-03 검색해봄.</ref>,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973173 한국 문화파워 아르헨서도 빛난다] 연합뉴스, 2009-09-13, 2011-08-03검색해봄.</ref> 등지에서 열린 적이 있으며 [[뉴욕]]에서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 [[카롤리나 에레라]]가 메르세데스 벤츠 패션위크 2011 봄/여름 컬렉션<ref>{{언어고리|en}}[http://www.kaneesha.com/Carolina-Herrera Carolina-Herrera] 2011-09-11 검색해봄</ref>에서 한국의 저고리와 치마를 표현하여 갓을 하나의 소재로 소개했다.<ref>{{언어고리|en}}[http://iamkoream.com/carolina-herraras-nyfw-show-hanbok-inspired/ Carolina Herrera’s NYFW Show: Hanbok Inspired!] KoreAm- The Korean American Experience, 2009-10-18</ref> [[대한민국 정부]]는 한스타일의 일원으로 한복과 한글, 한옥 등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해놓고 있다.<ref>[http://cms.korea.kr/goadmin/newsViewOld.do?newsId=155176788 한(韓)스타일(HanStyle) 육성 종합계획(2007~2011) 발표] 공감코리아 2011-09-10 검색해봄</ref>
 
== 한복에 대한 인식 ==
정부 차원에서 한복을 국가 브랜드의 일환으로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과 달리 한복에 대한 대중의 인식 부족<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415011008 “한국서 한복 푸대접… 국격 논할 자격 없다”] 서울신문 2011-04-15</ref><ref>[http://www.fnn.co.kr/content.asp?aid=710db2d2d5464aada36ee770f27c5c42 “장신구는 문화이자 역사”- 전통을 촌스럽게 여긴다는 사람들의 인식이아쉽다는 경기 무형문화재 18호 옥석장 김영희 선생] 포커스신문 2009-05-14</ref>은 현재 한복을 계승하고 발전하려는 노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명절에도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외면 당하는 한복<ref>[http://nadri.hankooki.com/lpage/weekzine/200501/wz2005013018160961630.htm "한복을 다시 생각한다"디자이너 정구호-김영석 설맞이 대담] 한국일보 2005-01-30</ref>의 현 주소를 타개하고자 하는 데에는 의견이 나뉜다. 개량하고 생활에 맞도록 변화를 추구하는 한복이 결국에는 한민족 고유의 의복 자체를 상실하게 한다는 주장<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105010338211250060 개량 한복 좋지만 전통미 사라져 국적불명 우려] 문화일보 2011-01-05</ref>과 현대인에게 외면 받지 않으려면 쇄신을 통해 한복을 입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양립하고 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10416/36457433/1 문전박대는 한식-국악도 당하고 있다] 문화일보 2011-04-16</ref><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271739065&code=100203 “천편일률적 한복 패션쇼 바꿔봤죠”] 경향신문 2008-03-2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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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임에 따른 구분 ==
[[Image파일:Joseon-Portrait of Cha Jegong-Black danryeongpo.jpg|thumb|160px|18세기 흑단령포]]
어느 의복이든 때에 따라 입는 형상과 모습은 달라진다. 한복도 마찬가지로 신분에 따라 그 옷의 문양과 자수가 달라지는 한편 여러 의상의 배합과 성격도 달라졌다. 때문에 관혼상제의 기준에 따라 관복과 혼례복, 상복, 제례복이 달리 나타났다. 그러나 특정 의복이 꼭 관복이나 혼례복에만 쓰이는 경우만 있지는 않았으므로 관복의 일종<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2211743121&code=940100 학위복도 패션시대] 경향신문 2005-02-21</ref>이었던 앵삼은 궁중무용에 쓰이는 옷이기도 한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0060245 정통 궁중무용 연극으로 재구성 ‘실험’] 문화일보 2004-02-17</ref>
 
=== 관복 ===
{{본문|관복}}
관복이란 궁정에서 신하들이 입었던 옷으로 직업복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계급과 직위에 따라 색과 문양 등이 달랐다.<ref>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2005년, 202쪽</ref> 조선 시대에는 무관의 경우 가슴에 호랑이를, 문관의 경우 가슴에 학을 그려놓았으며 [[당상관]]은 두마리, [[당하관]]은 한 마리만 그려놓았다.<ref>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휴머니스트, 2006년, 130쪽</ref> 신라 시대 이후로 입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지속한 관복은 [[김춘추]]가 당나라에 당나라식 관복을 입겠다고 당 태종에게 말하면서<ref>서영교, 《신라인 이야기》, 살림, 2009년, 115쪽</ref> 이후 신라 왕실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고려]] 때에는 [[원나라]] 궁정과 비슷한 형태로 변화되었다가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의 형태와 비슷해졌다. 조선 시대의 관복은 명나라에서 차용했지만 세부적인 것은 고유의 특성이 있어 태종 16년에 관복색과 형태, 세종 12년에 조복, 공복, 상복을 정했다. 복식 앞을 장식하는 문양, 즉 [[흉배]]는 [[조선 단종|단종]] 2년에 공표됐다.<ref name="김경수">김경수, 《한국사 테마전》, 돋을새김, 2007년, 149-150쪽</ref> [[조선 성종]] 때에 집필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영조 때의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는 관복의 종류와 색깔, 모양, 제작 방법 등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ref name="한국고문서학회"></ref> 관복도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며 조선 말 개화기에 이르자 형태가 간소화되고 개화사상의 도래로 인해 양복화가 진행됐다. [[조선 고종|고종]] 21년에는 갑신의제개혁이 공표되어 관복과 사복 모두 [[두루마기]]를 착용하도록 했다.<ref>부산예술대학교동학연구소,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예문서원, 1999년, 77-78쪽</ref>
 
관복은 직급에 따라 색깔, 형태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 조복, 상복, 공복, 영복 혹은 군복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ref group="주해">조복은 임금에게 예를 갖추는 등 큰 의례가 있을 시 입은 옷으로 특별히 화려한 관복이여서 소재, 질감, 흉배, 장식 등이 특별했다. 상복(常服)은 가장 보편적인 관복으로 보통 매일 입는 옷으로 썼다.</ref> 조복은 관복의 다른 이름으로 왕실의 칙령이나 축제 시에 입었던 관복이며 제복은 [[제사]] 중 입었던 의식을 위한 복식에 해당한다. 공복은 궁궐에서 왕을 비롯한 청중 혹은 손님이 있을 경우 입었으며 영복은 군복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관복 자체는 좁은 의미로 공복이나 상복 즉 보통 입는 옷을 가리키며 둥그런 형태로 목을 감싸는 형태다. 이를 두고 단령이라 부른다.<ref>[http://english.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18/2007051861023.html Veteran Korean Designer Enchants Smithsonian Museum] 조선일보 영어판, 2007-05-18. 2011-08-15 검색해봄.</ref>
==== 곤룡포 ====
{{참고|곤룡포}}
[[곤룡포]](袞龍袍)는 조선시대의 임금이 시무복으로 입던 옷으로 일반 관복과 그 디자인이 비슷하지만 가슴에는 [[금색]] 실로 용을 수놓았으며 사모와 같이 입는다. 곤룡포는 실제로 예를 갖추거나 의식용으로 사용되는 임금의 옷이었기에 세자 신분일 경우에는 색감과 재질에 차이를 두었다.<ref>[http://koreana.kf.or.kr/view.asp?article_id=7950&lang=Korean&volumn_id=520&sword=&flag=long 다시 살아나는 바람의 옷, 한복] 김문자, 한국교류재단 2011-08-25 검색해봄.</ref> [[세종실록]]에는 관련된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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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에서 세종의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선 태종|태종]]이 맞이하였으며 세종은 당시 세자의 신분이었으므로 붉은 옷에 옥띠를 둘렀다.
 
* 정묘일 동짓날에 임금이 면류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신하들을 이끌고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예를 갖췄다.<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8년. 168쪽</ref>
 
곤룡포는 왕이 편전에서 신하들을 소집해 국정을 논의할 때 입었던 복장으로서 국정을 처리하던 낮 시간에 입었기에 기타 의복 중에서도 입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ref>신명호,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궁중문화》 돌베개, 2002년. 2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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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이전에는 곤룡포의 천이 붉은 비단이었으나 [[조선 고종|고종]]은 황제로서 금색 곤룡포를 착용했다.
 
==== 구군복 ====
 
 
구군복(具軍服)은 군복의 다른 이름으로서<ref name="우리옷만들기"></ref> 조선시대에 임금 또는 무관에 해당되는 관직을 가진 벼슬아치나 지방의 수령이 입는 한복을 일컫는다. 오늘날의 장교 정복에 해당되는 복장으로 등급에 따라 노란 색에 소매만 붉은 색의 두루마기에 검은 색의 조끼를 걸친 것과 파란 색에 소매만 붉은 색의 두루마기에 검은 색의 조끼를 걸친 종류 등이 있다. 보통 군복의 안에 덧대어 입으므로 이를 "군복의 속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군복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무신의 복식이었다.<ref>민승기, 《조선의 무기와 갑옷》, 가람기획, 2004년. 421쪽</ref>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는 구한말 유럽식 군복을 입은 [[기병|기병대]]와 구군복이 혼재하고 있는 모습이 서술되어 있다.<ref>이사벨라 버드 비숍, 이인화 역.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1994년, 75쪽</ref><ref group="주해">구한말의 군복은 1895년 4월 9일 칙령에 따라 서구식으로 완전 개혁되었으며 저자의 묘사는 일련의 개혁이 있기 이전의 과도기를 보여준다.</ref>
 
임금이 입는 구군복은 다른 구군복에 비해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조선 철종]]의 초상화에는 임금용 구군복을 입은 철종 임금이 그려져 있다.
 
=== 혼례복 ===
[[File파일:Korean.costume-Hanbok-wedding.bride-01.jpg|thumb|left|110px|활옷]]
말 그대로 결혼식을 할 때 입은 한복을 뜻한다. 전통 혼례 시 신부는 다홍[[치마]], 연두색 [[회장저고리]]에 [[원삼]]이나 [[활옷]]을 입고 [[큰머리]]를 얹고 [[용잠]]을 꽂으며 [[도투락 댕기]]{{#tag:ref|댕기의 일종으로 원래는 여자 아이가 길게 늘어트리고 다니던 자줏빛 댕기를 말하지만 궁중이나 양반가문에서 신부가 원삼이나 활옷의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쓸 때 쪽진 머리의 뒤쪽에 붙인 것이다. 이 때에는 [[원삼]]이나 [[활옷]]의 혼례복을 입고 쪽진 머리의 뒤쪽에 간이로 붙여 댕기를 더 길게 보이도록 내렸다.<ref>장승욱, 《한겨레 말모이》, 하늘연못, 1997년, 107쪽</ref>|group="주해"}}를 늘이고 [[화관]]이나 [[족두리]]를 쓴다. 거기다 손을 감추기 위해 길게 덧댄 소매인 [[한삼]]을 착용했다. 신랑은 [[바지]]·[[저고리]]·[[조끼]]·[[마고자]]·옥색 [[두루마기]]·[[각대]]·[[사모관대|사모]]를 쓰고 [[포선]]을 손에 든다.<ref>{{글로벌2|주소=http://donation.enc.daum.net/wikidonation/ency.do?vol=008&code=005002002000000000 |제목=옷의 종류}}</ref>
 
신랑의 혼례복이 [[사모관대]]로 대표되는 것과 달리 신부는 각 절차에 따라 옷의 형태가 달라지곤 했다. 신부의 혼례복에는 특별히 자수나 문양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궁중혼례복과 반가의 결혼식 때 신부의 [[활옷]]에는 다채로운 꽃무늬가 표현되는 한편 소매의 끝자락에는 금박 자수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이 그려져 있었다.<ref name="이상희"></ref>
 
=== 상복 ===
상복(喪服)은 가족의 상을 당한 사람이 입는 옷을 가리킨다. 서구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검정색 의복을 입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 왕조 때까지 [[한반도]]의 상복은 흰색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녔다. '''소관'''이라고도 부르는 상복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죽어서 염을 하지 않았을 경우나 아직 장례 절차에 대한 준비가 안 되었을 경우에는 흰 천이나 비단을 덮어 주었다.<ref>박성렬, 《선택받은 색》, 경향미디어, 2002년, 255쪽</ref> 상복을 [[유교]]식으로 채택한 시기는 [[고려 성종]] 4년 때였으며 이 때 중국식 오복제도가 적용되어 부계식 상제가 세워졌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이러한 제도는 상류층부터 실현하도록 권고를 한 것이었을 뿐 강제되지 않아 조선 시대의 가부장제와는 차이가 있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7&aid=0000005996 한 식구 8촌서 남 같은 4촌으로] 주간동아 2008-09-24</ref>
 
=== 제례복 ===
제례복은 [[제례]] 시 입는 의복을 별도로 지칭하는 말이다. 대표적인 예가 [[종묘 제례]]인데 이 때에 입는 제례복은 별도의 디자인이 존재한다.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며 색 또한 빨간색과 남색 등이 공존하여 안정감을 주는 형태를 띤다. <ref>최경원, 《GOOD DESIGN》, 길벗, 2004년, 284-285쪽</ref> 제례복은 상복과 혼돈하기 쉬우나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옷으로서 그 종류가 몇 가지 존재한다. 보통 이 옷들을 "상복 최"(衰) 자를 사용하며 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입는 옷을 [[참최복|참최]](斬衰), 어머니를 위한 옷을 자최라고 부른다.<ref>[http://news.donga.com/3//20090521/8734202/1 見齊衰者하시고 雖狎이나 必變하시며] 동아일보 2009-05-21</ref>
 
=== 서민복 ===
서민복(庶民服)은 서민들이 입던 옷으로 서민의 복식은 귀족 계층과는 달리 그 틀이 지속됐다. 개화기에 이르기 전까지 서민복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저고리와 바지·치마가 기본을 이룬 고유 복식의 명맥이 이어졌다.<ref>김은정, 서린 공저, 《역사 속의 우리옷 변천사》, 전남대학교출판부, 101쪽</ref> 보통 아이들의 한복으로 떠오르는 빨강 치마와 노란색 저고리 등도 혼인 전에 입었던 서민복에 해당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032323 <ASEM 정상회의> 조선시대 의상입은 마네킹 등장] 연합뉴스 2000-10-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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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한복 ===
[[파일:Draft of maleHanbok.png|thumb|right|200px|남자 한복의 도안]]
남자 한복은 [[마고자]], [[두루마기]], [[행전]]으로 이루어지며 입는 순서는 바지, 저고리, 조끼, 마고자 순이다.<ref>[http://news.donga.com/3/all/20100212/26137390/1 한복 입으려면 제대로 입어라] 동아일보 2010-02-17</ref> 외출 시나 세배, 차례, [[제사]] 등 의례에는 장소가 실내라 할 지라도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예의이다..<ref name=cj>[http://www.cjstory.com/story/story_view.html?cont_id=20091100204900 맷시나는 우리 옷, 구석구석 정겨워라], 생활 속의 이야기 151호 14쪽, 2009년, CJ제일제당</ref><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10131001416&subctg1=&subctg2= 한복 맵시있게 입는 법] 세계일보 2011-01-31</ref>
 
저고리는 본래 적고리라고 불리었는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저고리를 입었다. 남자의 저고리는 형태나 구조의 변화가 별로 없었고 여자의 저고리에 비해 직선적으로 만들어진다. 남자 저고리는 대부분 민저고리이나 15세 정도까지 입는 색동저고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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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는 몸판, 깃, 섶, 소매, 고름 등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고름은 저고리의 잎을 여밀 때 겹쳐지는 섶에 붙어 있는 끈으로 긴 고름과 짧은 고름을 반리본 모양으로 맨다. 섶의 끝 부분인 섶코는 [[버선]]의 코처럼 삐져나오게 한다. 바느질 방법에 따라 홑저고리, 겹저고리, 누비저고리, 깨끼저고리로 나누고 옷감의 색에 따라 민저고리, 반회장저고리, 삼회장저고리 등으로 나눈다. <ref name=cj/>
 
조선 왕조 동안 저고리는 점차 짧아지면서 그 부피도 펑퍼짐했던 것에 비해 좀 더 몸에 달라 붙는 형태로 바뀌게 됐다. 16세기 이전에 저고리는 현재의 배기팬츠처럼 펑퍼짐해 허리 밑으로 쳐질 정도였지만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국가 상황으로 천을 덜 쓰는 쪽으로 의복이 변화되게 되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27/2011062702249.html 조선 여인 저고리 길이 300년간 2/3나 짧아져] 조선일보 2011-06-28</ref> 18세기가 지나면서 짧고 상반신으로 더 올라온 저고리는 거의 가슴을 덮지 않는 정도로 짧아져<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60531000890&ctg1=01&ctg2=&subctg1=01&subctg2=&cid=0101080100000&dataid=200605311325000038 조선조 한복도 유행탔다…전통복식 패션쇼] 세계일보 2006-05-31</ref> 여성들은 허리띠를 높이 착용해야 했다. 원래는 치마를 동여매는 용도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허리띠는 18세기 후반에 들어 패션 소품으로서 드러내게 되어 19세기에는 보편화 되었다.<ref name="Hyesoon"></ref> 그러나 중인과 천민은 아들을 낳았을 경우에만 허리띠를 노출했으므로 거의 허리띠를 드러내 매고 다니지 않았다.<ref>Han, Hee-sook "Women’s Life during the Chosŏn Dynast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6 2004 p. 140</ref>
 
여성의 치마는 조선 왕조 동안 길고 풍성한 느낌을 가지다 17~18세기에 이르러 치마의 풍성한 느낌이 엉덩이 부분으로 집중되어 서양식 허리받이처럼 튤립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1800년 치마의 풍성함이 더 두드러지게 되어 19세기 동안 무릎과 발목 주변으로까지 치마 천이 풍성해져 치마가 뒤에서 볼 시 그 실루엣이 삼각형과 흡사한 모양을 띠게 되었으며 이는 현재에도 널리 통용된다. 실루엣을 의도하기 위해서 다리속옷, 속속옷, 단속옷, 고쟁이 등도 입었다.<ref name="규방공예">김지영,《규방공예》, 컬처라인, 2000년, 24쪽</ref><ref>이이화《한국사이야기22》, 한길사, 2004년. 44, 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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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의 한복 ===
[[파일:Hanbok.jpg|thumb|right|150px|한복을 입은 아이들]]
[[File파일:Baby's Hanbok.jpg|thumb|right|150px|아이들의 한복]]
 
과거 어린 아이들은 [[설빔]]의 일종으로 [[설날]]에 까치저고리를 입었다. 사실 까치저고리는 색동 저고리의 별명으로 액땜을 하고 복을 비는 의미이며 보통 오색을 이루는 색의 배합은 온 우주를 상징한다. 보통 남자 아이는 남색, 여자 아니는 자주색 돌띠를 둘러 입힌다.<ref name="우리옷만들기">심화전, 《우리옷만들기》,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4년, 14,91,175쪽</ref> 만약 옷 위에 두루마기를 둘러 입으면 까치 두루마기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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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입히는 바지는 따로 [[풍차바지]]라 불렀으며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입혀 유아기부터 4~5세 사이까지 편하게 입혔다. 남자바지와 비슷하지만 앞은 막히게 만들고 뒤는 트여 여미게 되어 있어 용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특별히 편하게 만들어졌다.<ref>김정호, 《풍차바지 제도에 관한 연구》, 한남대학교 의류학과, 2008년, 참조.</ref>
 
== 고유한 특성 ==
=== 옷감 ===
한복에는 다양한 면직물이 소재로 쓰이며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혼직물 등 그 범위도 더욱 넓어지게 됐다. 소재의 사용도 [[저고리]], [[바지]] 등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고 [[계절]]에 대해서도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47&aid=0000012566 아름다운 한복도 예절에 맞게 입어야] 오마이뉴스 2002-09-20</ref> 저고리의 경우 명주, 옥양목, 일반모직 등 일반 소재<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686865 설날- 한복차림과 세배요령] 연합뉴스 1993-01-14</ref>로만 10가지가 넘으며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 봄과 가을에는 명주나 갑사, 항라, 국사 천을 사용한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150930431&code=900305 (그여자네)한복, 강렬한 원색 곱구나] 경향신문 2007-02-15</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928301001 추석 한복 멋내기] 서울신문 2007-06-28</ref> 사철 고루 쓰인 소재는 깨끼였으며 성인 남자의 [[두루마기]]에는 명주, 양단, 실크가 많이 쓰였다.<ref name="우리나라옷">석주선, 《우리나라옷》, 광문출판사, 1966년, 10쪽</ref>
 
안감과 겉감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어서 가장 널리 쓰인 소재 중 하나인 명주의 경우 명주저고리에는 대부분을 명주로 안감처리하고 여의치 않으면 깃과 끝동, 섶 안쪽만이라도 명주로 지었다. 이렇게도 상황이 되지 않으면 올이 가는 무명이 쓰였다. 실제로 저고리 연구에서 밝혀진 소재의 비율은 명주가 60%로 절반이 넘으며 그 뒤를 무명, 삼베가 이었다.<ref name="장인우">[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2ff1eadcc94dd681# 조선초기 저고리의 복원적 고찰] 장인우,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1985년, 72, 77, 78쪽</ref> 경우에 따라서는 명주와 무명이 혼방으로 안감된 경우도 발견된다. 저고리가 찢기거나 헤지면 대부분이 동일한 옷감을 대어 박음질 처리하였으며 팔꿈치에는 큰 조각을 덧대고 박음질했다.<ref name="장인우"></ref> 저고리에 명주가 많이 쓰였다는 사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적삼]], [[치마]], [[버선]], [[바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복에는 명주와 무명, 문사 등이 고루 사용됐다.
 
양반들은 촘촘히 짠 [[모시풀]]과 여름에도 가벼운 소재로 입을 수 있는 옷을 입고 보통의 천이나 [[실크]]는 더운 날씨가 아닌 보통 때 두루 입었다. 신분 상의 제약으로 평민은 [[면]] 이외에 다른 소재로 짠 한복을 입는 것이 금지됐으므로 신분을 알게 되는 척도 중의 하나가 의복의 소재였다.<ref>지그프리트 겐테,《신선한 나라 조선 1901》책과함께, 2007년, 77쪽</ref>
 
==== 색상 ====
[[File파일:Korean traditional clothes-Hanbok-01.jpg|right|thumb|150px|다채로운 치마와 저고리의 색깔]]
상류층이 입었던 한복은 색감이 아주 다양했으며 보통 어린 아이들이 다홍색이나 노란색 등 밝은 색을 많이 입고 중년층은 조금 더 중후한 색상을 즐겨 입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상시 흰색 한복만을 입도록 되어 있었고 황색은 황제의 색이라 하여 사용이 금기시 되었으며 금박, 자수 등도 궁중가례복<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b701a5e15f69c3ee&p_mat_type=1a0202e37d52c72d&p_submat_type=&fulltext_kind=&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re_a_kor&DDODFlag=&loginFlag=1 조선시대 궁중가례복식 중 왕비복을 응용한 현대복식DESIGN 연구] 박희정, 간호섭, 디자인포럼21 4권(2001), 153쪽</ref> 등에서 쓰여 서민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색에 대한 기준과 계급에 따른 분별은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존재했다.<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bb5bc0b567b26d62ffe0bdc3ef48d419&p_mat_type=1a0202e37d52c72d&p_submat_type=&fulltext_kind=&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re_a_kor&DDODFlag=&loginFlag=1 한국 고유의상의 멋] 고복남, 교수아카데미 총서 7-1, 일념, 1994년, 4-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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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의 색을 재현한 느낌의 천연 염색 톤은 현대에 들어 예전부터 더욱 고급스러운 한복의 특징으로 나타난다.<ref>[http://weekly.hankooki.com/lpage/woman/200502/wk2005020114405337550.htm 설빔, 우아하고 정갈한 우리옷 입기] 주간한국 2005-02-01</ref> 쪽빛, 제비꽃색, 홍화색 등 은은한 자연 색상과 함께 수박색, 대춧빛이 감도는 빨간색 등 색감이 깊은 천연 염색<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31893 저고리 하얀동정 눈부시고 열두폭 긴 치마 물결치네] 경향신문 2003-09-18</ref> 등으로 색상도 더욱 다채로워 지고 있다. 한복연구가 [[박술녀]] 씨는 “젊은 층엔 홍화나 치자 등을 염료로 한 밝고 경쾌한 색상을, 중장년층엔 쑥이나 녹차, 오리나무 등을 염료로 한 은은하고 기품있는 색상”을 추천한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9271514431&code=900305 올 한복 맵시는 ‘단아한 멋’] 경향신문 2009-09-27</ref>고 밝힌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색감에 있어서는 명조 대비보다는 옅은 색감으로 안정감을 주는 색깔 배치가 각광 받게 되어 커플룩으로 입는 경향에 맞추어 [[두루마기]]에 이르기까지 그 색감이 변화하고 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health/200909/h2009092921111684530.htm 유행따라 변하는 한복, 깨끗한 피부… 단아함 돋보여] 한국일보 2009-09-29</ref>
 
=== 문양 ===
조선 시대까지의 한복은 신분에 따라 문양도 다양하여 금박을 한 당의를 비롯해 식물, 동물, 기하학의 형상을 한 무늬 등 여러 종류가 나타났다.<ref name="이상희"></ref>
이들은 문양마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결혼한복에는 주로 모란꽃, 장미, 당초 문양을 사용했다.<ref>[http://ehistory.korea.kr/pop/photo_pop2.jsp?photo_PhotoSrcGBN=FP&photo_PhotoID=0&detl_PhotoDTL=322 한복의 자수] 2011-08-01 검색해봄.</ref> 각 문양은 하나하나가 각기의 독특한 의미를 지니며 일례로 [[학]]은 고고하고 청초한 이미지를 나타내 길상을 상징하였다. 호랑이나 용은 학과 더불어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냈다.<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2d0cf43495a6de77ffe0bdc3ef48d419&p_mat_type=1a0202e37d52c72d&p_submat_type=&fulltext_kind=&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re_a_kor&DDODFlag=&loginFlag=1 한국 전통복식과 현대에 되살아난 멋 생활한복] 창원대학교 디자인연구소 조오순, 2004년. 5쪽 </ref> 문양은 자수, 금박, 조각잇기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여러 종류의 문양은 한복 뿐 아니라 한국 문화의 한 획을 차지하고 있다.
 
==== 자수 ====
[[File파일:Korean embroidery-Joseon Dynasty-Hyungbae-Rank badge-01.jpg|thumb|left|180px|[[흉배]]에 놓인 자수. 수놓은 모양으로부터 무관(호랑이), 당상관(두마리)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 자수는 페르시아 문명에서 유래하여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후에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ref name="임경화"></ref> 현재까지 중국처럼 고대의 자수가 발견된 사례는 없으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바 고구려 귀족들은 공사 시 자수가 된 비단옷을 즐겨 입었으며 특별히 독특한 기마 민족의 자수를 만들어냈다.<ref>김원용, 《한국미의 탐구》, 열화당, 1978년. 51쪽</ref> 이에 반해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고 중국과 고구려와 통했기 때문에 남북조의 영향을 두루 받아 연화, 인동당초, 와운문 등 섬세하고 단순한 형태의 자수가 많았다.<ref>이강성, 《공예총론》, 수학사, 1970년. 161-162쪽.</ref> 통일신라시대가 되자 사회통합을 위해 더욱 장려되던 [[불교]]의 영향을 받은 자수가 성행하고 고려 시대에도 국교였던 불교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발현되어 국화, 연꽃, 단풍, 대나무, 매화, 사신상 등 다채로운 문양이 등장하게 된다.<ref>박봉관, 〈전통 의상에 표현된 현대적 감성의 문양에 대한 연구 : (드라마 '황진이'의 의상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2007년 28-29쪽.</ref> 조선 시대에 이르러 한국다운 자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 평민들도 자유롭게 자수를 꾸리면서 민간에서도 그 비중이 확대되고 드넓어진다. 일례로 궁내에는 자수를 전담하는 수방이 생길 정도로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 금박, 은박 등을 하여 권위를 나타냈다.<ref name="이현숙">[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36494c6dccf399bcffe0bdc3ef48d419&p_mat_type=be54d9b8bc7cdb09&p_submat_type=f1a8c7a1de0e08b8&fulltext_kind=dbbea9ba84e4b1bc&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bib_t&DDODFlag=&loginFlag=1 현대 한복의 장식성에 관한 연구 : 1986~1997년을 중심으로] 이현숙,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96-97쪽. 2005년.</ref>
 
자수에는 크게 손 자수와 기계자수가 있으며 중국과의 수교를 1992년 맺으면서 저렴한 노동력으로 손 수를 주문하는 고객도 늘었으나 여전히 기계 자수를 선호하는 업체가 많다. 대개 자수는 저고리, 당의, 배자 등의 여자 한복에 많이 이뤄져 꽃 모양의 문양이 많이 들어가며 현대에도 저고리 소매에 자수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c9324a8e7fd0aa9dffe0bdc3ef48d419&p_mat_type=be54d9b8bc7cdb09&p_submat_type=f1a8c7a1de0e08b8&fulltext_kind=a8cb3aaead67ab5b&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bib_t&DDODFlag=&loginFlag=1 당초문을 응용한 한복상의의 자수문양 연구] 유장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84-88쪽 참조</ref> 1986년~1997년 사이의 한복에 대해 연구한 논문은 자수가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자수의 문양이 갈수록 작아지고 더욱 현대적인 감성을 띠게 되었다고 파악했다.<ref name="이현숙"></ref>
 
==== 박장식 ====
[[File파일:Korea-Geumbak.on.Hanbok-01.jpg|thumb|right|200px|금박이 놓인 한복의 치마폭]]
박 장식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고조선]] 때의 청동기는 수은을 바르고 그 위에 금박 혹은 은박을 하여 열을 가해 수은을 증발시켜 도금하는 방법을 썼다.<ref>청아출판사,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한국고대사》, 2000년, 42쪽</ref>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박 장식은 여자 한복에 많이 쓰여 치마나 저고리를 장식하는 역할을 했다. 금박과 은박이 대표적이며 금박(金箔)은 [[금]]으로 문양을 새긴 것으로서 보통 '박'이란 한지를 대어 밑그림을 그리고 조각하여 문양을 만드는 것을 뜻했다.<ref>[https://www.knowledge.go.kr/SearchSF1/search_view.jsp?mdno=33513391&nowurl=https%3A%2F%2Fwww.knowledge.go.kr%3A443%2FSearchSF1%2Fsearch_result.jsp%3FcolAlltrue%3D%26rccollection%3Dall%26inSearch%3Dblock%26startCount%3D0%26page%3D1%26resultcount%3D%26reqkind%3D0%26collection%3Dall%26sortOrder%3D1%26mType%3Dall%26searchText%3D%25ED%2595%259C%25EB%25B3%25B5%2B%25EB%25AC%25B8%25EC%2596%2591%26reSearch%3D%25EB%25B0%2595%26mc_collection%3Dall%26notLog%3DN%26resourcecodeex%3Dall%26detail%3Dnone%26sortField%3DRANK%26tType%3Dall 전통 문양을 응용한 생활한복 디자인에 관한 연구] 채송화, 2006년, 국민대학교</ref> 실제로 박으로 장식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금박은 저고리의 깃에 쓰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고름과 함께 쓰이고<ref>[https://www.knowledge.go.kr/SearchSF1/search_view.jsp?mdno=1398254&nowurl=https%3A%2F%2Fwww.knowledge.go.kr%3A443%2FSearchSF1%2Fsearch_result.jsp%3FcolAlltrue%3D1%26rccollection%3Dall%26inSearch%3Dblock%26startCount%3D120%26page%3D1%26resultcount%3D10%26reqkind%3D0%26collection%3Dall%26sortOrder%3D1%26mType%3Dall%26searchText%3D%25ED%2595%259C%25EB%25B3%25B5%2B%25EA%25B8%2588%25EB%25B0%2595%26reSearch%3D%26mc_collection%3Dall%26notLog%3DN%26resourcecodeex%3Dall%26detail%3Dnone%26sortField%3DRANK%26tType%3Dall 공단 저고리(부분금박)] 2011-08-03 검색해봄.</ref> 치마 아래의 경우에는 맨 밑단을 따라서만 수를 박을 하거나 두루두루 박을 할 수도 있었다. 금박은 반드시 옷에 쓰인 것이 아니며 주머니, 수저집, 향낭, 댕기 등 다채로운 경우에 쓰여 지니고 다녔다.<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00090008 귀주머니] 2011-08-03 검색해봄.</ref><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00112416 십장생 수저집] 2011-08-03 검색해봄.</ref>
 
은박의 경우에는 고름에 특히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나 금박과 같이 흔히 쓰이지 않으며 실제로 소비자도 금박을 선호하기 때문에 골고루 쓰인다고 볼 수는 없었다.<ref name="이현숙"></ref> 박장식은 실제로 의복 뿐 아니라 비단으로 짠 경전에도 쓰였으며<ref name="성기옥">성기옥, 《조선 후기 지식인의 일상과 문화》,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7년, 207, 212쪽</ref> 완당 김정희가 살았던 조선 중기에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 금박, 은박 종이가 널리 사용돼 조선에도 수입됐다.<ref>이규태, 《한국인의 생활문화 2》, 신원, 2000년, 32쪽</ref> 박 장식을 할 때에는 특별히 손이나 각종 기물 등 어디에나 금이나 은이 달라붙기 쉽기 때문에 잘 붙지 않는 종이나 명주, 합성섬유로 조심히 다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ref>곽동해,《한국의 단청》, 학연문화사, 2002년, 68-69쪽</ref>
 
== 장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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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장식 ===
[[Image파일:Miindo-Yun.family.of.Haenam-d1.jpg|left|140px|thumb|여성의 가발 일종인 가체]]
{{참고|쓰개}}
남자와 여자 모두 결혼하기 전까지는 머리를 땋아 내리고 다녔으며 남성의 경우 결혼 후 [[상투]]를 틀어 머리 위에 묶었고 여자의 경우 머리를 목 뒷부분 바로 위에 동그렇게 말아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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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부터 가체를 대체한 작은 모자인 족두리를 착용하기 시작했지만 기생은 가체를 19세기 말까지 착용했다. 한편 오늘날에는 전통적 방법처럼 머리를 말아 놓은 부분에 관통하도록 하지 않고 비녀와 유사한 형태의 핀을 악세사리로 착용하기도 해 머리를 장식하기도 한다.<ref>[http://www.youtube.com/watch?v=Gw8GKXcHBCY 젓가락비녀 또아리 머리, Hairbun with hiarstick]</ref>
 
==== 비녀 ====
{{본문|비녀}}
비녀는 여인들이 머리를 지탱하여 올리기 위해 머리를 뒤로 묶어 둥그렇게 말아 꽂던 장신구이다. 비녀는 [[한자]]로는 잠(簪)이라 썼으며 기혼 여성들은 혼인을 올렸다는 증거로 착용했다. 따라서 여인에게 비녀는정절과 품위의 표현이었다.<ref>[http://mhj21.com/sub_read.html?uid=9863&section=sc120 기혼여성들에게 꼭 필요했던 장신구 비녀] 문화저널21 200902-0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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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자료에 따라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으며 금이나 주옥은 상류층에게만 사용이 허락되었다. 칠보나 은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용의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 [[용잠]]이나 봉잠도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26019 옛 여인의 향기를 모아] YTN 2004-02-04</ref>
 
==== 족두리 ====
족두리는 특별한 의식 때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관(冠)의 일종으로서 다른 이름은 족아·족관이다. 보통은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6각형의 형태를 띠며 가운데 솜이 들어 있고 가운데를 비워서 얹어놓고 비녀를 질러 고정한다.<ref>[http://ehistory.korea.kr/pop/photo_pop2.jsp?photo_PhotoSrcGBN=FP&photo_PhotoID=0&detl_PhotoDTL=258 족두리] 한국역사정보 2011-07-31 검색해봄.</ref> 족두리는 원래 [[몽골]] 여자들이 쓰는 모자 장식의 일종으로 [[원나라]]의 공주들이 [[고려]]로 오면서 착용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족두리에도 무엇을 써서 장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외향이 변형되고 달라져서 화관으로 불리기도 했다.<ref name="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4》, 한길사, 2001년, 6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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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족두리 착용이 사대부 부녀자 사이에서만 가능했던 것에서 조선 중기부터는 서민들에게도 혼례식 때만은 족두리의 착용을 허용하여 여러 장식을 하여 혼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종류는 소재나 모양에 따라 민족두리, 어염족두리, 솜족두리 등으로 이름이 달리 불렸다.<ref>김종태, 《옛것에 대한 그리움》, 휘닉스드림, 2010년, 67-68쪽</ref> 《[[규합총서]]》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를 만드는 법이 간략하게 쓰여 있다.<ref>정용화,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5》(문화사상), 휴머니스트, 2006년, 64쪽.</ref>
 
==== 아얌·조바위 ====
[[파일:Korean hat-Ayam-01.jpg|top|thumb|left|100px|아얌]]
아얌과 조바위는 추위를 막기 위해 부녀자들이 두르던 머리 장식으로서 일종의 방한모이다. 두 종류 모두 위는 트이고 귀를 덮이도록 생겼으며 귀부분에는 털이 달리게 되어 있었다. 뒤에는 아얌드림을 늘어트려 띠처럼 내려오게 했다. 두 종류 모두 머리장식이지만 아얌의 경우에는 귀를 덮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아얌과 조바위가 별 구분없이 쓰이다 아얌은 조바위가 널리 퍼지면서 급속히 사라져 한복의 구성 요소 중에서는 가장 빨리 사라지게 됐다. 때문에 방한용 모자의 일종으로 조바위는 조선 말기 양반층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ref name="규방공예">141쪽</ref> 귀를 덮는 부분은 안으로 약간 오그라들게 하고 바람을 막도록 천을 덧대었다. 색에는 두 종류가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으나 조바위의 경우 안감과 겉단 색을 다르게 하였으며 겉에는 검정색이나 자주색을 쓰는 대신 안감은 남색이나 흑색, 자주색을 썼다.<ref name="이상희">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넥서스, 2004년, 102쪽, 141쪽.</ref>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1920년대 서울 풍경이 조바위를 쓰고 있는 한국 여인의 모습과 같다고 쓴 바 있다.<ref>[[엘리자베스 키스]], 송영달 역.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1920~1940년대》, 책과함께, 2006년, 3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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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위와 비슷한 것으로 남바위가 있으며 남바위에 비해 쪽진머리가 보이도록 짧게 한 것이 조바위다. 남바위는 보통 남자가 쓰던 방한모에 해당한다.<ref>장승욱, 《재미있는 우리말 도사리》, 하늘연못, 2004년, 117쪽.</ref> 아얌과 조바위, 굴레 등의 머리쓰개는 보통 여자 아이의 경우 굴레, 젊은 여성은 아얌, 노인이 쓰던 것을 조바위<ref>임혜경,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매너와 예절》- 22장 한국복식과 예절, 새로운 사람들, 2003년, 91쪽</ref>로 칭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돌잔치]]를 할 경우 여자 아이에게는 다홍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조바위 혹은 굴레를 씌웠다.<ref>정해옥, 《한국 음식》, 문지사, 2002년, 127쪽</ref><ref>지후맘, 《지후맘의 베이비 바이블》, 김영사, 2007년, 204쪽</ref>
 
=== 노리개 ===
[[File파일:Samjak Norigae.jpg|thumb|right|140px|삼작노리개]]
가장 흔히 알려진 한복의 장신구는 노리개로서 노리개는 한복 저고리의 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여성 장신구의 일종<ref>[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 노리개] 국립국어원 검색결과 2011-07-31 검색해봄.</ref>이다. 그 속뜻은 "소중한 물건", "사랑하고 즐기며 아끼는 물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ref name="이경자">이경자, 《노리개》, 2005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2-13쪽</ref> 노리개는 신분에 관계 없이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이 착용했으며 신라 시대와 고려 왕조 동안에는 허리띠 쪽에 찼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저고리 아래 부분으로 그 위치가 올라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ref>[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117103 노리개] e-museum 2011-07-31 검색해봄.</ref>
 
노리개는 고유 의상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어 단조로울 수 있는 의복을 치장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 색조는 홍·남·황 삼원색을 비롯해 자주, 보라, 옥색 등 열두 색에 이를 정도로 다양했으며 왕실에서부터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노리개를 착용했다.<ref name="규방공예">김지영, 《규방공예》, 2000년, 컬처라인, 30쪽</ref>
 
=== 주머니 ===
한복에는 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고, 주머니를 선물로 주는 경우도 많았다. [[엽전]]을 담는 경우에는 엽낭이라 불렀으며<ref name="규방공예">133쪽</ref>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향수를 담고 다니는 향낭이 부인들 사이에서는 비단으로, 평민들 사이에서는 헝겊으로 만들어져 널리 쓰였다.<ref>주경옥, 《향 향수 향기》 세창출판사, 1995년, 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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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또한 다른 한복과 마찬가지로 재질과 색상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신분에 따른 차등 적용이 있어〈중종실록〉에 따르면 상민이 비단으로 짠 주머니와 띠를 착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f name="한국고문서학회">한국고문서학회, 《조선시대생활사》, 역사비평사, 2006년, 41쪽, 84쪽</ref> 저고리의 경우에는 원래 안쪽에 다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며 조선 후기가 되어 양복이 들어오면서 왼쪽 상단에 작은 주머니를 단 조끼가 등장하기 시작하게 된다.<ref name="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4》, 한길사, 2001년, 44쪽</ref>
 
=== 보자기 ===
{{본문|보자기}}
{{참고|조각보}}
[[File파일:Bojagi for queen.jpg|thumb|left|180px|왕비가 사용했던 보자기]]
보자기는 그 역사가 [[삼국시대]] 때부터 시작<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625021011 한국인 첫 시카고예술대 名博 이성순 소마미술관 명예관장] 서울신문 2010-06-25</ref>했으나 그 사용과 발전은 조선 시대에 많이 이뤄져<ref>[http://www.bookrags.com/research/pojagi-ema-04/ 보자기] 2011-08-15 검색해봄</ref> 궁중에서는 보의 쓰임새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세분화되어 있었다. 한복에 어울리는 장신구의 의미로서 물건을 싸는 용도였던 보자기는 복을 쌓아둔다는 의미를 지녀 무속 신앙과 관련된 사람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한편, 무엇인가를 정성스레 싸 둔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했으므로 예물을 싸는 혼례용 보자기의 경우 그 아름다움도 더욱 가미됐다.<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42cfecfb7342df31&p_mat_type=be54d9b8bc7cdb09&p_submat_type=f1a8c7a1de0e08b8&fulltext_kind=dbbea9ba84e4b1bc&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bib_t&DDODFlag=&loginFlag=1 조각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장신구 조형 연구] 조상희,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2005년. 11-1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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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쓰던 궁보는 그 종류와 함께 자수와 금박에 따라 달랐으며 왕비의 대례식에는 봉황을 새긴 보자기가 사용되거나 왕의 경우에는 여의주를 문 자수가 새겨지기도 했다.<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71be65b326d691c8&p_mat_type=be54d9b8bc7cdb09&p_submat_type=f1a8c7a1de0e08b8&fulltext_kind=dbbea9ba84e4b1bc&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bib_t&DDODFlag=&loginFlag=1 색채를 통한 한국 이미지의 표현연구] 라연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0년. 15-18쪽</ref> 다양한 자수와 금박이 쓰였던 궁보와 달리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썼던 민보는 상대적으로 소탈하며 그 색채도 투박하여 다목적 기능에 유용하도록 함이 보통이었다.<ref>[http://www.riss.kr/search/download/FullTextDownload.do?control_no=be39323b810649c5&p_mat_type=be54d9b8bc7cdb09&p_submat_type=f1a8c7a1de0e08b8&fulltext_kind=dbbea9ba84e4b1bc&t_gubun=&convertFlag=&naverYN=&colName=bib_t&DDODFlag=&loginFlag=1 조각보의 이미지를 통한 色彩와 造形性 연구 : 本人의 作品을 中心으로] 홍은하,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2002년, 6-9, 15-20쪽</ref><ref>[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b981072642fed59d# 조각보를 이용한 추상표현 연구 : 本人作品을 中心으로] 신현정, 동아대학교대학원, 2002년. 8-12쪽</ref>
 
== 한복의 관리 ==
한복은 소재와 매무새가 평상복과는 차이가 있어 관리가 생명이라는 말이 있다.<ref name="dongA2007">[http://news.donga.com/3//20070210/8405967/1 전문가가 권하는 ‘아이 설빔 예쁘게 입히기’] 동아일보 2007-02-10</ref> 양복과 달리 한복은 옷걸이에 걸어두면 색이 바래고 형태가 변하기 때문에 담아 둘 곳을 따로 마련하여 수납하는 것이 이롭다. 여자 저고리는 팔 부분을 꺾어 접고 남자 저고리는 소매를 고름과 만나게 해 접은 후 몸통을 한 번 더 접어 보관하며{{#tag:ref|여자 한복에서 치마는 뒤집어서 천과 천이 접히는 부분을 따라 여섯 번 접어야 하며 금박이나 은박 등이 있는 부분에는 한지를 넣어 대주는 것이 좋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419967 한가위 한복으로 멋내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0098310 구김살 펴고 얼룩 빼고 올바른 한복 보관법]</ref>|group="주해"}} 저고리의 동정 부분은 주름을 펴서 보관해야 탈이 없다.<ref>[http://www.fnnews.com/view?ra=Sent10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2216729&cDateYear=2011&cDateMonth=02&cDateDay=02 한복맵시 빛내는 깔끔 관리법] 파이낸셜뉴스 2011-02-02</ref> 또한 입기 전에는 때가 탄 곳을 간단히 닦은 후 다림질을 꼭 해야 한다.<ref name="dongA2007"></ref>
 
섬유에 따라서 주의할 점은 면일 경우에는 간단히 세탁을 해도 무관하지만 명주라면 [[드라이 클리닝]]을 하는 것이 좋다.<ref>[http://news.donga.com/3//20080130/8539270/1 색상으로 체형 커버… 설날 한복으로 멋부리기] 동아일보 2008-01-30</ref> 단, 소재가 얇기도 얇은데다 바느질이 섬세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드라이 클리닝을 자주하면 금방 상해버려 되려 옷이 상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나일론]]과 [[울]], [[폴리에스테르]] 등 합성 섬유를 겸한 것이라면 손빨래가 이롭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106550 설 한복 예쁘게 입기] 경향신문 2005-02-03</ref>
 
== 같이보기 ==
* [[갈옷|제주 갈옷]]
* [[치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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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의상}}
 
[[분류:한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