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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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혁명|1830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조]]가 전복되면서 프랑스의 가톨릭 왕당파측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새 프랑스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안코나]]를 장악하는 일이었으며, 이로써 이탈리아, 특히 [[교황령]]은 혼란과 정치적 소요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국가 독립과 통일을 위해 [[주세페 마치니]]가 이끄는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운동과 조베르티와 카포니가 이끄는 신교황주의로 양분되어 있었다. 신교황주의는 교황청의 지지를 받았으나 공화주의 운동은 배척당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공화주의 운동이 더 우세하였다. 교황령에서는 붉은 셔츠 공화당원들로 구성된 유격대와 여러 차례 교전을 벌이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에는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오스트리아]]의 군사력까지 빌리게 되었다. 당시 보수적이었던 교황청에서는 폭탄 테러와 암살 시도들이 끊이지 않자 교황청은 사람들에게 약속한 일련의 개혁들을 연기하였다. 1836년 [[국무성성 장관 추기경|교황청 국무성성 장관]]을 [[톰마소 베르네티]] 추기경에서 [[루이지 람브루스키니]] 추기경으로 교체함으로써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하였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와 국무성성 장관 람브루스키니 추기경은 조명기구와 철도와 같은 기본적인 기술 혁신마저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교황령에 이와 같은
한편, 그레고리오 16세는 원래 [[신학]]과 선교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교황좌에 오른 후에도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소생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여러 대리구를 설정하고 [[성사]] 집전을 허용하였다.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 교구]]를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키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천주교 조선 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병에 걸려 입국에 실패하고, 앵베르 주교가 그 뒤를 이었다. [[캐나다]]에는 교구 네 개를 설정하고 [[1844년]] 퀘백 교구를 승인하였다. [[미국]]에는 교구 열 개를 세우고 볼티모어 교구를 재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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