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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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6세와 국무성성 장관 람브루스키니 추기경은 조명기구와 철도와 같은 기본적인 기술 혁신마저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교황령에 이와 같은 현대 문명을 도입할 경우, 교역량이 늘어나 부르주아 계층이 더욱 강한 권력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여 결국에는 교황의 통치력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특히 그레고리오 16세는 철도를 이탈리아어로 ‘chemins d'enfer’, 즉 ‘지옥으로 가는 길’(프랑스에서 철도를 ‘철의 길’이라고 부른 것을 풍자한 것)이라고 일컬으며 강력히 반대하며 금지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그레고리오 16세는 원래 [[신학]]과 선교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교황좌에 오른 후에도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소생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여러 대리구를 설정하고 [[성사]] 집전을 허용하였다.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 교구]]를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키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천주교 조선 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병에 걸려 입국에 실패하고, 앵베르 주교가 그 뒤를 이었다. [[캐나다]]에는 교구 네 개를 설정하고 [[1844년]] 퀘백 교구를 승인하였다. [[미국]]에는 교구 열 개를 세우고 볼티모어 교구를 재조정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는 자연주의와 유리주의의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주교 임명에 있어서 그 나라의 관습을 인정하였으나 교황권이 미치도록 노력하였다.